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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때 새 가사·동시 발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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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숭전대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17세기초의 선비 수남방옹 정훈의 한글가사 5편과 시조가수를 포함하는 유고집을 공개하면서『광·인대의 우수한 작품유산』이라고 밝혔다.

<호는「수남방옹」>
최근 간행된『숭전어문학』2집의 부록으로 영인 소개한 이 유고집은『수남방옹 유고』여기에 박요순교수의「정동과 그의 시가교」란 논문을 게재해 시인으로서의 면모와 작품내용을 개선했다.
본시 이 유고집은 작고한 고고학자 김양선씨 수집의 고본인데 그의 소장품을 일괄해 숭전대에 기증함으로써 현재는 대학 도서관이 간수하고 있는 유일 본의 문집이다.
필사본으로 된 이 책은 한 장으로 꾸며 불과 26장52면(28×33㎝) 1책. 수남방옹 자신이 엮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의 사후 손자 대에 이르러 비로소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의 그의 행적과 묘비명·제문 및 유고로서 한시와 한글 시가가 함께 수록돼 있다.

<남원의 향반>
정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및 광해군의 폭정. 인조반정등 어려움이 겹쳤던 이조중엽 남원에 살았던 향반. 명종1년(1563) 에 나서 인조18년(l640)에 죽었다.
그의 행장에 의하면 서당에도 가본 일이 없이 독학했을 뿐이고 또 등과 한일도 없지만 시인으로서의 재질을 타고나 많은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일부 선비들과는 교류가 두터웠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묘비는 숙종 때의 명사인 현석 박세채가 지었고 유고집의 서문은 이조판서와 우찬성을 지낸 박필주의 글이다.
유고집에 수록된 한글가사 작품은『성주중흥가』(1백6구) 『탄궁가』(84구) 『우간가』(92구)『용추유영가』(1백20구) 『수남방옹가』(91구)등이며 시조로는『월곡답가』(10수) 이외에 『곡처』『자둔』『문북인변』등 10수이다.

<성주중흥가는 일품>
『성주중흥가』는 61세에 지은 것으로 그의 가사 작품중 가장 높이 평가되어 있다. 광해군의 포악한 행위를 비분강개하며 인조반정의 감격과 찬사를 쓰고 나아가 정치의 정도와 새 임금에 대한 소망과 축수를 올리는 내용이다.
그래서 가사문학에서 흔히 보는 음풍농월의 즉흥적인 토로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대담한 고발정신으로 일관돼 있다. 그것은 단순한 충군애국이 아니라 사회상을 낱낱이 들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의식적이고도 조직적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탄궁가』는 빈궁한 생활상을 소재로 하며 평범한 일상용어로 엮었지만 그 주제를 추구하는 작가의 소박하고 진지한 자세로 말미암아 작품의 격을 높이면서 재능을 보인 작품.
『용추유영가』는 지리산 아래 용추동 일대의 승경을 읊은 우경 시이다. 지역의 특색과 춘하추동의 경치를 차례로 노래한 짜임새는 송순의『만앙형가』나 송강의『성산별곡』과도 비견되는 바 지리산을 노래한 유일의 가사작품이란 점에서도 주목되고 있다.
『수남방옹가』는 자신을 소재로 하여 그 생활을 읊은 것인데 말미 일무의 책장이 떨어져버렸다.
이들 가사작품에 대하여 해설자 박교수는『이조시대 가사작품으로 상위 급에 속한다』고 평가하면서 구성이 치밀하고 학적으로도 주목할 만 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훈의 작품중에 더욱 주목되는 것은 시조이다. 시조의 시어를 순수한 우리말로 가려썼는데 지엽적인 기법에 얽매기보다는 시정신의 내적인 깊이에서 시구가 형성됐기 때문에 비록 20수에 불과하지만 매우 수작이라는 것이다.
『뒷 뫼에 뭉킨 구름
앞들에 퍼지것다
바람 불지 비올지
눈이 올지 서리올 지
우리는 하늘뜻 모르니
아무탈 줄 모로 리다.』
『예서 그리난 뜻을
제서 아니 모로 난가
무던히 고은님
덧없어 여의을 듯
하루밤 새고 난 후에
다시 볼가 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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