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배명복 칼럼

구애하는 북한, 외면하는 남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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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지난주 서울에서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정세에 대해 토론하는 비공식 세미나가 열렸다. 내로라하는 북한 전문가들이 다수 참석했다. 하지만 토론회 내내 장님 코끼리 만지는 답답함을 느꼈다. 북한 공식매체의 보도 내용, 탈북자 단체들로부터 들은 소문, 북한과 선이 닿는다는 사람들이 전한 첩보 등을 토대로 각자 그림을 그렸다. 코끼리를 보고 누구는 호랑이라고 하고, 누구는 고양이라고 하는 식이었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니 우리는 모른다”가 결론 아닌 결론이었다면 지나친 폄훼일까.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손자의 얘기를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상대가 있는 게임에서 정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다못해 포커나 고스톱을 치더라도 상대의 패를 읽느냐 못 읽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내 패는 숨기고, 상대의 패는 훤히 볼 수 있다면 게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국제관계도 다르지 않다. 정보 싸움의 승패가 국가의 운명까지 좌우한다. 미국이 ‘21세기의 빅브러더’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정보전쟁에 올인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으로 정보전쟁에 취약했다. 정보력 부재 탓에 당하지 않아도 좋을 수모와 굴욕도 많이 겪었다.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을 깊이 연구한 한명기(명지대) 교수는 당시 조선에 비해 청(淸)과 왜(倭)의 정보력은 압도적이었다고 말한다. 청은 후금 시절부터 조선에 직접 첩자를 보내거나 요동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매수해 정보를 수집했다. 자국으로 투항하거나 잡혀온 조선인들 가운데서 첩자를 뽑아 침투시키는가 하면 조선의 상인이나 역관들까지 첩자로 활용했다. 청은 조선을 손바닥처럼 훤히 꿰고 있는 반면 조선은 청의 사정에 캄캄했던 것이 두 번씩이나 수모를 당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란 것이 그의 지적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 푸른역사)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왜관(倭館)의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 1년 365일 상주하며 주변의 조선인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하고 있었던 데다 조선 말에 능통한 사람도 아주 많았다. 그 결과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조선의 사정을 모조리 탐지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의 조정은 청이나 왜의 동향에 관한 부정확하고 단편적인 정보를 놓고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로 갈려 해석 싸움에 몰두했으니 굴욕과 수모는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새해 들어 북한이 대남(對南) 유화 공세에 열을 올리고 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강조한 이후 북한은 연일 남측을 향해 추파를 던지고 있다. 지난주 북한은 국방위원회 명의로 상호 비방·중상 중지, 군사적 적대 행위 전면중지, 핵 재난을 막기 위한 현실적 조치 등을 제안했다. 2~3월로 예정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키리졸브 연습과 독수리 훈련을 중단하라는 요구도 물론 잊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의 ‘중대 제안’은 바로 퇴짜를 맞았다. 통일부는 “비방·중상 중지 합의를 위반하고 그동안 비방·중상을 계속해 온 것은 바로 북한”이라며 “정당한 군사훈련에 시비를 걸 게 아니라 과거 도발행위에 대해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고 당장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 행동부터 보이라”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설 명절에 맞춰 중대 제안을 먼저 실천에 옮기겠다고 선언하는 등 전례 없는 구애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한·미 합동군사훈련과 연계된 북한의 제안을 박근혜 정부가 받아들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외유 중에도 박 대통령은 “북한이 이런 선전공세를 할 때일수록 대남도발에 철저히 대비하는 등 안보태세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위장 평화공세에 속지 말란 얘기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정부가 북한 정세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런 대응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부정확한 정보가 희망과 선입견이 가미된 주관적 해석과 만나면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북측과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누면 그들도 약속한 부분에 대해 지킬 것은 지키려고 노력한다.” 철없는 종북주의자의 빈말이 아니라 박 대통령 자신이 자서전에서 한 말이다. 2002년 5월, 박 대통령은 국회의원 신분으로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일대일로 만났다. 박 대통령은 “북한에 다녀온 후 남북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며 “진심을 바탕으로 상호 신뢰를 쌓아야만 발전적 협상과 약속을 기대할 수 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박 대통령이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의심이 정확한 정보와 객관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느냐는 점일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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