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저금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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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놀러 나갔다가 들어온 네살박이가 느닷없이 「텔리비젼」이랑 전화랑 사달라고 성화다. 아마 함께 놀던 제 친구들이 우리는 「텔리비젼」이랑 전화랑 있다고 자랑을 했나보다고 자식에게 무언가 다 채워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일종의 죄책감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나 엄청난 생활고에 생각이 미쳐 쉽게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한참 만에야 장난감 삼아 가지고 노는 5원짜리 돼지저금통을 고사리 같은 손에 쥐어 주고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누가 돈을 주면 까먹지 말고 여기다 넣어라. 동광이가 저금을 많이 해 학교에 가면 엄마는 「텔리비젼」도 사주고 전화도 사주고 그럴 테다.』 동광이의 얼굴은 금방 해님이 되어 환해지고 입은 함박만하게 벌어진다.
나는 어린 아들과의 약속이 실없이 되지 않도록 10만원짜리 보험을 들었다.
동광이는 기특할 정도로 저금통을 채워갔다. 돼지배를 갈라 쏟아 놓은 동전들이 금송아지만큼이나 사랑스럽고 귀하다.
그 1천4백80원을 정기 예금하고 또 10원짜리 저금통을 사다 놓았다. 그런데 머리통만 채우면 다 찰 저금통을 누가 집어가 버렸다.
「오버」 주머니 속에 넣어 둔 돈 1만원이 없어졌을 때보다 더 마음이 아프다. 『어린것이 먹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눈물이 핑 돌기까지 했다.
맥빠진 며칠을 보낸 뒤 동광이 생일날 다시 저금통을 사러갔더니 10원짜리는 없고 20원 30원짜리는 있단다. 『100% 뛰었구나.』
심각한 물가고를 절감하며 20원짜리를 사와 아빠께 『동광이 생일 기념으로…』하고 내밀었다. 5백원을 넣어 주신다.
나도 내 쌈지를 털었다. 저금통을 동광이에게 쥐어주며 『또 하자』고 했더니 동광이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새로 저금통을 채우기 시작한 동광이에게 다시는 이런 아픔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유명숙 (전남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910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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