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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 때문에 CEO 꿈 접을 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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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이태경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태경
경제부문 기자

모든 직장인의 꿈은 최고경영자(CEO)다. 조직의 넘버원이 되기 위해 벌이는 직원 간 선의의 경쟁은 조직을 발전시키는 핵심 에너지다. 그런데 애초에 CEO를 꿈꾸기 힘든 조직이 있다면? 직원들의 근로 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조직 분위기도 느슨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공공기관이 딱 그렇다. 정권만 바뀌면 권력줄을 잡은 낙하산 인사가 CEO로 내려와서다. 본지 조사 결과 박근혜 정부 들어 임명된 공공기관 핵심 임원(기관장·감사) 160명 중 정치인·관료를 포함한 낙하산 인사는 92명(57.5%)으로 절반을 훌쩍 넘었다. <본지 1월 17일자 1, 6면, 18일자 6면>

 반면 내부승진 인사는 13명(8.1%)에 불과했다. 그마저 한두 명 내부 출신을 배출한 곳은 다행이다. 한국마사회·신용보증기금과 같은 기관은 역대 수십 명의 CEO 중 내부 출신이 단 한 명도 없다. 민간기업에서 20~30년 일한 친구·선배의 CEO 영전 소식은 이곳 직원들에게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상당수 직원들은 “입사 때는 CEO가 꿈이었지만 매번 낙하산이 내려오자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됐다”고 토로한다. “정년까지 힘들지 않게 근무하는 게 목표”라는 이들도 꽤 있다.

 꿈을 접은 대가일까. 공공기관 노조와 낙하산 CEO 사이에는 은밀한 거래가 이뤄지곤 한다. 노조가 “낙하산 반대”를 외치면 CEO는 노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편한 근무환경, 높은 수준의 성과급과 복리후생과 같은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식이다. 이러다 보니 일부 공공기관에서는 “기왕이면 더 힘 센 낙하산이 왔으면 좋겠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CEO가 정권 실세여야 조직을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논리다. 엄청난 부채를 떠안고도 직원 대우는 최고인 ‘신의 직장’이 된 데에는 이런 악순환의 반복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물론 모든 것을 낙하산 탓으로 돌리며 복리후생 챙기기에만 급급한 노조의 주장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공공기관 개혁의 칼을 뽑으려면 정부가 먼저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노조에 애초에 빌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때문에 지금처럼 낙하산 인사로 공기업 수장을 채우기보다는 내부에서 CEO가 될 수 있는 길을 더 많이 열어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직원들은 CEO가 되기 위해 내부 경쟁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공공기관은 조직발전의 에너지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래야 “공기업 파티는 끝났다”는 정부의 선언이 엄포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공공기관 경영혁신의 첫 단추가 낙하산 근절에서 시작돼야 하는 이유다.

이태경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