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침 제의에 대한 북한의 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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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26일자 북한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사설은 박정희 대통령이 지난 1월 18일 연두 기자회견 석상에서 내놓은 남북한간 불가침협정 체결 제의를 공식으로 거부했다. 이 신문은 북한 당국의 의견을 공식 대변하는 기관지이므로 이로써 북한 당국자의 의견은 분명히 밝혀진 셈이다.
최근 북한은 한국 안의 사소한 일들에 대해서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 왔었는데, 불가침협정 제의에 대해서 9일간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비로소 거부의 태도를 명시하게 된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것이다. 아마도 북한은 불가침협정 제의를 거부할 논리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고, 또 불가침협정 제의에 대한 거부가 국제적인 해빙 무드에 역행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망설이던 끝에 9일 만에야 간신히 회답을 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불가침 협정 제의에 반대하는 것은 이 제의가 『2개의 한국을 영구화하고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거가 하등의 타당성을 갖지 못한 것임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4반세기 이상이나 지속되고 있는 남북한 분단대립의 가혹한 역사적 현실로 보아, 불가침 조약 체결에 의한 평화공존 관계의 구축만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공고히 하면서 분단·대립이 자아내는 민족적인 고통과 희생을 완화하고 평화통일을 향해 착실하게 접근해 나갈 수 있는 단 하나의 현실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자들은 평화공존이 바로 조국 분단의 영구화를 의미하는 것처럼 선전하고, 그들이 원하는 평화통일이라는 이름의 적화통일노선을 강요코자 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주권을 무시하고 사사건건 남한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용喙하는 한편, 입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4대 군사노선 강화 등 남침 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냐 전쟁이냐, 공존이냐 적대냐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들이 이제 평화의 가면마저 벗어버리고 불가침 협정 제의를 정식으로 거부했다 해서 조금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절대로 원치 않는다. 우리는 두개의 대립점인 통일노선, 즉 「자유주의적 통일노선」과「공산주의적인 통일노선이 격돌을 벌이면 필연적으로 6·25의 비극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하는 까닭으로, 그들에 대해 상호불간섭, 상호불가침, 휴전협정의 효력 지속을 골자로 하는 협정을 맺자고 까지 제의한 것이다. 우리는 평화통일의 성취가 지극히 어려운 과제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선은 갈라진 채 나마 남·북이 자유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다방면적인 교류와 합작을 촉진하고 나아가서는 평화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조건을 성숙시키자고 제의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당국이 최대한의 선의에서 나온 우리의 이같은 전쟁방지책, 긴장완화 방안마저 거부하고 나섰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피비린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적화통일의 야욕을 이룩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 볼 수밖에 없다. 한국은 지금도 이 야망을 분쇄하고도 남을만한 역량을 충분히 갖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해야 한다는 민족적인 양심의 명령으로 북한을 향해 불가침 협정의 체결을 제의했던 것이다.
북한 당국자들은 아직도 늦지 않으니 적화통일의 망상을 버리고, 민족적인 양심을 살려 우리의 제의를 수락하기를 강력히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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