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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예술의 화학반응 실현될지 모른 채 시작 어려워서 끌리는 작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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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호 08면

올라퍼 엘리아손의 ‘A view becomes a window’(2013). Courtesy Ivorypress.

영국의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79) 경(卿·Sir)에게는 매우 유명한 부인이 있다. 정신병리학 교수이자 카운슬링 전문가로 스페인 공영방송에서 ‘레츠 토크 어바웃 섹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레이디(Lady) 엘레나 포스터(Elena Ochoa Foster·55·사진)다. 지금은 사진·디자인·건축 분야의 책을 전문적으로 연구·출판하는 아이보리 프레스(IVORY PRESS)의 대표로 국제 미술계에서 이름이 높다.

현대미술 작가와 ‘아티스트 북’ 만드는 레이디 엘레나 포스터

그녀가 2006년 고향인 스페인 마드리드에 만든 작은 서점은 영국의 더 타임스(The Times)가 인정한 유럽 최고의 미술 관련 책방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09년에는 서점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아이보리프레스 스페이스(Ivorypress Space)라는 전시공간으로 개관, 예술과 책이라는 두 가지 영역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사실 그녀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아이보리 프레스만의 차별화된 포인트로 내세우는 점이 바로 현대 미술과 책의 화학적 결합, 즉 한정판 ‘아티스트 북(Artist Book)’ 제작이다. 아티스트 북이라면 흔히 북 디자이너가 자신만의 감각을 발휘해 만드는 독특한 책 혹은 작가들이 직접 제작한 특별한 도록을 의미하지만 레이디 엘레나 포스터가 추구하는 아티스트 북은 좀 다르다. ‘책’이라는 개념을 작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형상화한, 일종의 설치 작품이다.

마침 마드리드 아이보리프레스 스페이스에서 사진작가 구본창의 개인전 ‘SLOW TALK’가 열렸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이다. 그 현장에서 레이디 엘레나 포스터를 한국 언론 최초로 만났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Detritus’(2006).

마드리드 북쪽에 있는 아이보리프레스 스페이스를 찾았을 때 처음 눈에 띈 것은 아이보리 프레스에서 운영하는 서점이었다. 30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에는 그간 출판된 사진·건축·디자인 관련 서적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이곳에서 나온 책뿐만 아니라 관련 서적까지 볼 수 있는 도서관 같은 곳이었다.

서점 옆으로 나있는 작은 문을 통해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좁고 긴 통로를 따라 내려가자 커다란 화이트큐브가 나타났다. 주차장을 개조해서 모던한 공간으로 만든 이 전시장은 역시나 “남편이 직접 디자인해 준 곳”이란다.

입구 왼편으로 프라이빗 뷰잉 룸 형식으로 마련된 ‘아티스트 북’ 전시장이 있었다. 레이디와 작가들이 1996년부터 시작해 20년 가까운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 만든 ‘아티스트 북’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국내에도 많은 팬이 있는 애니시 카푸(60)의 아티스트 북 ‘상처(Wound)’는 수백 장의 종이를 쌓아 만든 블록 중앙에 상처 같이 크랙을 넣은 작업이다. 모두 4개의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데, 파트1은 천으로 만들어진 박스에 커버는 붉은색 양각으로 핸드 페인팅 처리를 했다. 파트2는 흰 실크에 수제 실제본으로 제작된 책이다. 320 마고 에탐프 수제종이에 상처 부분의 드로잉을 직접 그려 넣은 사본과 사진으로 구성했다. 파트3는 레이저 커팅된 종이 26장을, 마지막 부분은 50장의 레이저 커팅된 종이로 제작된 조각이다.

이미 작고한 프랜시스 베이컨(1911~90)의 아트북은 재단과의 협업을 통해 제작됐다. 리스 뮤에 있는 베이컨의 자택에서 브라이언 클라크에 의해 발견된 베이컨의 낡은 가죽 여행가방이 테마다. 현재 아일랜드 더블린시티갤러리에 보관된 76개 아이템의 복제본으로 구성돼 있다. 사진·잡지의 페이지, 스케치, 각종 도구, 그리고 베이컨이 작성한 편지와 노트들이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브라이언 클라크와 엘레나 포스터가 연구해 선정했다.

조각가 앤서니 카로 경은 4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금속으로 만든 조각으로 책 커버를 제작했다. 또 이사노 노구치, 올라퍼 엘리아슨 등 현존 최고의 현대 미술작가들도 동참했다.

작가들이 자신만의 느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낸 ‘아트북’은 서양의 미술관과 도서관의 수집 대상이다. 유명 북페어(Book Fair) 때 화제의 중심이 되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에디션은 6개에서 20개 정도이고, 가격이 억대가 넘는 것도 있다.

앤서니 카로의 ‘Open Secret’(2004).

이지윤: 아티스트 북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엘레나: 92년 결혼 이후 또 학자로서의 삶 이후, 나는 내가 항상 매력을 느낀 예술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 친구인 로버트 세인스베리 경의 “직관을 따라 해보라”는 조언 덕분에 아파트를 팔아 96년 출판사를 설립했다. 내게 아트스트 북이란 예술 작품으로서 의미가 있는 유니크한 리미티드 에디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들어 내는 과정 자체가 작가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볼 수 있는 총체적 결산인 만큼 적극적으로 즐긴다. 단순한 재정적 지원을 넘어 작가와 논의하고 그의 결정을 기다리며 함께 작품을 완성한다. 작가들에게 책이란 무엇인지 묻고 제작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 작가들과 함께 만들며 가장 어려웠던 일은.

: 처음에는 이런 작업이 실현 가능한 일인지조차 잘 몰랐다. 어떤 때는 작가들이 어려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려운 과정 자체가 치명적 매력이라고나 할까? 어렵기 때문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년에 한 권을 만들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 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 또 작가 선정은 어떻게 하나.

: 작가는 우리가 직접 선정한다. 일하고 싶은 작가를 초청하기 위해서는 헌신적으로 연락하고 설득해야 한다. 보통 처음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실질적으로 제작 작업이 시작되기까지 5년 정도 걸린다. 실 제작기간은 2년에서 3년가량 소요된다.

: 그렇게 오랜 기간이 걸린 작품이라는 점이 놀랍다. 예산은 어느 정도 제공을 해주며,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는가.

: 준비 과정에는 어떠한 계약서도, 정해진 예산도, 그리고 자문 위원도 없다. 힘들면 언제든 작업을 멈출 수 있다. 나는 작가와의 케미스트리(chemistry)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이 중요한 작가들이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니시 카푸의 ‘Wound’(2005).
애니시 카푸(왼쪽 위), 페르난도 구티에레즈(오른쪽 위), 리차드 터틀(오른쪽 아래)과 작업을 논의 중인 엘레나 포스터.

: 당신의 과거 전문영역이었던 정신 병리학은 어떤 영향을 주었나.

: 정신병리학은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임상적 증세나 정신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해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정신의학의 한 분야다. 덕분에 나는 작가들을 좀 더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인가. 남편이 지원하나. 아니면 자선기관의 후원을 받나.

: 아니다. 내가 사재를 털어 설립한 아이보리 프레스는 새로운 개념의 예술을 위한 문화 창업이다. 노먼 같이 대륙을 넘나드는 대형 건축가 옆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몰입할 나의 일이 필요했다. 물론 노먼의 지속적인 관심과 예술계에서의 중요한 네트워크가 있기에 더 많은 파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더욱 창의적이고 차별화된 콘텐트가 담긴 책을 만들어 다양한 방법으로 팔고자 한다. 아트페어에 아티스트 북을 가지고 나가기도 하고, 이런 책에 관심 있는 국제적 컬렉션의 연계도 계속해 나간다.

: 각국의 미술관이나 도서관, 혹은 기업이 만드는 도서관 컬렉션을 돕는다고 들었다.

: 우리는 책을 연구하고 기획해 만들어 준다. 도서관을 만들고자 하는 클라이언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큐레이터들이 컬렉션을 만드는 일과 비슷하다.

: 서점과 전시장이 잘 꾸며져 있다.

: 사진과 건축, 디자인 부분은 미술에 비해 소홀하다는 느낌이다. 출판을 하면서 어떤 작가들의 작업을 실제 공간에서 보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 마드리드에 이런 공간을 마련했다.

: 한국 사진작가 구본창의 전시를 이곳에서 보게 돼 기쁘다. 이번 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나는 19살부터 사진을 컬렉션 해왔다. 늘 사진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있었다. 구본창의 작품은 어떤 이미지를 찍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 대상과 공간을 사진이라는 미디엄으로 ‘담으려는’ 느낌을 준다. 매우 동양적이라는 직관적 느낌도 드는 동시에 서양의 접근과 매우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3년 전에 그의 작품 ‘화이트’ 시리즈를 구입해 마드리드 우리 침실 머리맡에 걸어놓고 있다.

: 아시아 작가들에게도 관심이 있는가?

: 당연하다. 더 글로벌한 교류를 더욱 적극적으로 하려 한다. 특히 한국은 매우 관심이 가는 나라이며, 앞으로 더욱 발굴될 작가들이 있는 곳이다. 이번에 구본창의 첫 책이 아이보리 프레스에서 출간된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테이트 모던 뮤지엄의 니컬러스 세로타 관장은 그녀에 대해 “현대미술계에 신선한 에너지를 가져다 주는 동시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가장 높은 기준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구본창 전시 오프닝에 참가한 노먼 포스터는 “엘레나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격과 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열정은 나를 매번 놀라게 한다”며 “엘레나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정이 되었다”는 말로 외조의 변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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