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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톰슨의 하이힐 퍼포먼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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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부장대우

발은 우리 몸에서 가장 천대받는 부위다. 의학 정보는 손보다 발이 훨씬 깨끗하다고 가르치지만, 발에 대한 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하루 종일 제 무거운 몸을 이고 다닌 수고로움을, 주인조차 잘 알아주지 않는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울퉁불퉁한 맨발 정도라면 모를까. 맨발은 감동보다 결례일 때가 많다.

 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로맨틱하거나 에로틱한 판타지를 담아내는 곳으로 돌변하는 게 발이기도 하다. 식탁 아래 남몰래 발로 상대를 터치하는 장면은 불륜, 에로티시즘, 치정의 대표적 이미지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이병헌이 이은주의 풀린 운동화 끈을 매어주는 장면은 로맨스의 교본이 됐다. ‘접속’에서 친구의 약혼자를 짝사랑하는 전도연은, 그가 벗어놓은 큼지막한 구두를 몰래 신어보며 설레었다.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도 하이힐이 주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주인공 커플이 본격적으로 얽히는 계기다.

 하이힐에 대한 최고의 명대사는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나왔다. 원작인 일본 만화의 대사다. 세탁소집 딸 구혜선이 처음 부자들의 파티에 가기 위해 치장하는 장면에서 여자선배가 하는 말이다. “여자에게 좋은 구두는 가장 중요해. 왜냐면 좋은 구두는 좋은 곳으로 데려다 주니까.”

 맞는 말이다. 화려한 명품 하이힐이 그녀를 노동 현장으로 데려갈 리 없으니까. 하이힐은 전시되는 육체의 상징이자 노동할 수 없는 신발, 육체노동 하지 않는 이들의 신분 표지이니까 말이다.

 그 하이힐의 이미지에 영국의 지성파 배우 에마 톰슨이 명장면 하나를 더 추가했다. 12일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다. 딸과 함께 맨발로 레드 카펫을 밟은 그녀는 맨발로 무대에 올라 시상했다. 굽이 15㎝쯤 되는 명품 하이힐을 들고 나왔다. 굽이 달린 붉은 밑바닥을 가리키며 “이 붉은색은 나의 피”라고 말한 뒤 구두를 집어던졌다. 지난주 전미비평가협회상 시상식에도 맨발로 나와 최우수 여배우상을 받은 그녀다.

 톰슨은 그때 “페미니스트로서의 의견을 밝히려고 하이힐을 벗었다”고 했지만, 사실 육체에 대한 사회적 압박 때문에 제 몸을 학대하거나 변형하는 것은 더 이상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른바 ‘180㎝ 이하 루저남’ 발언 이후 ‘깔창’은 젊은 남성들에게도 필수다. ‘1000칼로리 식단’ 등으로 연일 미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는 우리의 걸그룹들은 15㎝는 능히 되는 킬힐을 신고도 격한 안무를 고수하는 ‘능력자’들이다.

 톰슨의 하이힐 퍼포먼스는 한없이 통쾌하지만, 안타깝게도 남녀노소 루키즘(외모 지상주의)을 숭상하는 우리 사회는 아직도 흘릴 피가 더 많아 보인다. 나만 해도 이 글을 쓰고도 당장 하이힐에서 내려올 자신이 없으니 말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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