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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의「오우가」이전에『사우가』가 있었다.|원광대 이상변교수 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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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백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즐겨 읽히고있는 고산 윤선도(1587∼1671)의 한글시가『오우가』(『산중신곡』중에서)보다 40,50년 앞서 인조때 형조참판을 지낸 석탄 이신의(1551∼1627)에 의해 같은「스타일」의『사우가』가 지어졌음이 원광대 이상비교수의 조사연구에서 밝혀졌다.
『사우가』는 1801년(순조원년) 화순 만연승사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석탄집』가운데 『석탄선생문집보유』라는 독립항목으로 다른 6수의 한글시가와 함께 수록돼 있는데 이미 밝혀진『우탄집』가운데는 이들 시가가 수록돼 있는 것이 없어 이것은 최초로 밝혀진 이신의의 유일한 시가가 아닌가 보이고 있다. 이『석탄집』은 이신의와 같은 전의 이씨인 이만상씨(원광대농대교수)가 대대로 물려 받아 보관하고 있는 것을 작년7월 이상비교수가 검토한끝에 이들 시가가 수록돼 있는 것을 발견, 5개월에 걸쳐 이미 밝혀진 것인가의 여부를 조사 한 후 새로운 것임을 확인, 연구논문을 작성하여 월간「시문학」에 기고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시문학」3월호게재예정)
명종6년인 1551년 협성에서 출생한 이신의는 4세때 아버지를, 10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백씨집에서 성장하다가 34세때 효능참판이란 첫관직을 얻은후 41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군3백을 거느리고 왜적과 싸워 물리친 공이 인정되어 벼슬이 사무원직장에 이르렀다.
그 후 공조좌낭 고부군수를 거쳐 남원부사, 홍주·해주목사 등을 지냈는데 그가 67세때인 광인군9년 인목대비의 유폐사전이 일어났을 때 항소를 올린 것이 말썽이 되어 유배되었다.
『석탄모』에 보면 이를 10수의 시가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의 5년 동안 유배지에서 쓴 것으로 기록돼 있어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유배지에서 보내면서 주옥같은 글들을 남긴 고산 윤선도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
그러나 윤선도의 시가들이 대체로 연서이나 당세에 대한 욕구불만 따위를 품고 있는데 비해 비록 양적으로는 훨씬 뒤지지만 이신의의 시가는 다만 유연하고 청아하여 흐름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 이상비교수의 견해.
특히 이만철씨 소장의『우탄소』에는 다른 시가집에는 찾아 볼 수 없이『사우가』등 이들 시가에 대한 평문이 실려 있어 이신의의 시가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이의철 김시찬 윤식 등 기명으로 돼 있는 이들 평문을 보면 『회령서 광양에 이르는 수천리 유배생활에서도 조금도 꺾이지 않고 의연한 지기를 보인다.』『사군자를 노래한 것은 당세의 활란시기에 대한 송백지백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등 이신의 시가에 대한 아낌없는 격찬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윤선도의『오우가』가 수·석·송·죽·월을 노래한 것이며 이신의의 『사우가』가 송·난·매·죽 등 사군자를 노래한 것으로 송·죽이 양쪽에서 나타나고있음에 비추어 비록 섣부른 추측일는지는 몰라도 혹 윤선도의『오우가』가 이신의의『사우가』 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신의는 인조5년인 1627년 형조참판에 올랐는데 이해 정묘호란이 일어나 임금을 모시고 강화에 가던중 병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공이다. <추규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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