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에 서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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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모에 접어든다.
시간은 그처럼 무겁게만 느껴지는데도 시후는 어김없이 오고 간다. 우리를 위안해 주는 것은 언제나 그 시간인 것 같다. 면면한 역사를 두고 보아도 그 시간이 없었던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름에 잠겼을까.
그러나 시간에는 물리적인 시속과 감각적인 시속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똑같은 시간을 놓고 천추같이, 때로는 전광처럼 느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적인 시속에 따른 것이다.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것도 그렇다. 행복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그것이 사라지고 만 경우일 때가 많다. 그러나 불행은 마치 끈적끈적한 물체처럼 우리의 내면에서 좀 체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이런 때의 시간은 무겁고 길며 지루하고 어둡게 느껴진다.
역사가들은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말한다.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여기엔 시간이 없다. 사람들은 시간을 잃어버리고 산다. 순간이 천추처럼 생각된다. 시계의 초침엔 쇳덩이가 올려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아득한 역사의 지평 위에서 그 쇳덩이 같은 암흑의 시간은 한 반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시간의 초능력을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희망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단하는 결단과 용기를 갖는 것이다. 문득 세모를 맞으면 사람들은 그 잃어버렸던 시간들을 비로소 찾게 된다. 이제 마지막 남은 달력장이 우리에게 감상과 시름 속에서도 뜨거운 맥박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너는 생명을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시간이야말로 생명을 채워 주는 재료가 아닌가.』 「벤저민·프랭클린」은 그의 자서전 이렇게 교훈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마치 생물과도 같아서 언제나 신선하고 맑은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없으면 시간은 역시 암흑의 물체로, 생명이 없는 죽음의 존재로 전락한다. 『신선하고 맑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에겐 다른 생물과는 달리 반성하고 각성하는 천부의 능력이 있다.
반성과 각성이 없는 사람의 시간은 그것이 몇 만의 초를 거듭해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그의 생애조차도 무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누가 공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하루에 세 번 반성한다』고 아뢰었다. 공자는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두 번 만으로도 족하다.』
이제 73년의 마루터기에 서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남은 며칠, 남은 몇 시간만이라도 우리는 시간에 쫓기지만 말고 새로운 생명의 시문을 이끌고 가는 성찰과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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