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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약아진 일본, 턱밑까지 온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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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혜경
조혜경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혜경
경제부문 기자

“1975년 소니의 가정용 VTR ‘베타맥스’를 아는 분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이건 실패한 제품이니까요. 하지만 유명 VCR 기기인 베타캠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됐어요. 그래요, 소니가 일찍 실패를 경험한 게 다행이에요. 최근에도 우린 어려운 시기를 겪었어요. 고객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주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7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소비자가전전시회(CES) 2014’ 기조연설에서 소니의 히라이 가즈오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소니는 올 CES에서 삼성·LG와 초고화질(UHD) TV 신기술 경쟁에서 한발 물러선 듯했다. 대신 147인치 UHD 프로젝터와 클라우드 기반으로 어디서나 플레이스테이션4의 게임들을 다운받을 수 있는 ‘플레이스테이션 나우’를 소개했다. 새 UHD용 방송장비도 대거 내놨다.

 지난해만 해도 일본 가전업체들은 한국 경쟁자들을 잔뜩 의식했다.

 소니는 지난해 CES에서 세계 최초의 평면 UHD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를 내놓고, 그해 9월 독일에서 열린 가전박람회(IFA)에서 역시 최초로 곡면 LED TV를 공개했다. 그런데 히라이 사장은 올해 내놓은 UHD TV 85·65인치 신제품에 대해선 언급조차 없었다. 파나소닉도 전시 부스의 절반을 차세대 차량용 전장부품과 솔루션들로 채워놨다.

 물론 삼성·LG와 비견될 TV 제품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을 터다. 하지만 기조연설장에서 만난 소니 관계자는 이렇게 귀띔했다. “ 새 105인치 곡면 UHD TV를 내놓는다고 해서 소니가 돈을 벌까요? 아니면 삼성·LG가 경쟁적으로 출혈을 감내할 동안 그 생태계에 투자하는 게 더 ‘캐시카우’가 될까요?” 개발비용이 수천억원이 드는 TV 대신 각종 방송 장비와 시스템 등 UHD 생태계를 구축해 실속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중국업체들의 추격도 예사롭지 않다. 국내업체들이 선도 제품 격으로 내놓은 곡면 UHD TV를 하이센스, TCL 등 중국업체들은 6개월 만에 쫓아왔다. 약간의 ‘기술적 하자’는 숨기기 힘들었지만 이런 기세라면 내년 CES에선 국내업체보다 앞선 플렉시블 TV를 선보일지 모를 일이다.

 “UHD TV는 전 중국업체들이 다 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 수 아래로 처졌던 일본업체들도 재도약하고 있습니다.” TV부문을 맡은 하현회 신임 LG전자 사장의 말은 한국 IT 선두업체들이 처한 상황을 압축해 설명해준다. 기술은 턱밑까지 따라잡혔고, 생태계 조성은 한발 늦었다. 시장에서 확실히 1위를 굳힐 수 있을 차세대 경쟁력은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고 있다. 국내 가전업체들의 고민이 어느 때보다 커 보였다.

조혜경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