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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 촌부, 오월 광주, 실향민 주름살 … 흑백 사진으로 되살린 어렴풋한 기억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57호 26면

저자: 김녕만 출판사: 사진예술사 가격: 5만원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사진작가 김녕만(65)이 40년 넘게 찍어온 사진 중 고르고 추린 271점을 모은 사진집 『시대의 기억』은 가슴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기억들을 하나 둘 불러낸다. 어렴풋한 추억에게는 돋보기 안경을 씌워준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의 뒷모습이 이 흑백 사진들 속에서 역주행한다.

『시대의 기억』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작가는 스물두 살이던 1971년부터 고창 군청 공보실에서 사진담당으로 근무하면서 시골 사람들의 삶을 렌즈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가 남긴 사진이 지금 우리 눈길을 끄는 이유는 단지 팩트에 충실한 기록 사진을 넘어 유머와 페이소스까지 담아낸 걸쭉한 막걸리 같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고향, 고향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첫 장을 장식한 사진을 보자. 머리에 짐을 이고 오른손으로는 수탉 한 마리를 어깨에 걸친 젊은 촌부가 신작로를 걸어가고 있다. 그 앞에는 소형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다. ‘전북 고창, 1976년’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은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새마을 운동의 열기를 배경으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지점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땐 그랬다. 꼴을 먹던 소가 배가 덜 찼나 보다. 이제 집에 가야 하는데 소는 말을 안 듣고 억지로 코뚜레를 끌어당기는 소녀의 표정에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하다(전북 고창, 1974). 마당에 앉아 곡식 말리는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고무신을 입에 문 채 줄행랑치는 강아지는 이게 뭔가 싶었겠지. 냄새는 나는데(경기도 광주, 1980).

시골 직장을 뒤로하고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그는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산업화의 열기를 동력으로 기회의 땅 서울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근대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가는 도시민의 삶을 기록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시골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역동적인 서울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와의 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산이 훤히 뵈는 1974년의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아파트에 둘러싸인 2013년의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풍경은 우리에게 안녕들 하시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1980년 5월에 그는 광주에 있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다 희생되는 젊은 학생들과 명령에 따라 이들을 진압하던 경찰들의 희생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객관적인 중간 지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그가 유리창 뒤에서 찍은 광주는 그 자체로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는 길목을 지키는 사냥꾼이기도 했다. 남북고위급회담을 취재하던 그는 판문점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눈에 쌓여 미끄럽자 남북 군인들이 손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은 적중했고 회담 수행원으로 평양에 가는 남측 장교와 북측 안내장교는 눈길에서 잠깐 서로 손을 잡았다. 수많은 사진기자가 있었지만 ‘결정적 순간’을 잡아낸 것은 미리 예상을 하고 준비한 그뿐이었다.

사진집에 실린 마지막 사진은 ‘실향민, 경기도 파주’다. 주름살 투성이의 촌로가 철조망을 부여잡고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다. 1993년 모습이니 벌써 20년 전이다. 그 할아버지는 지금도 살아서 고향을 추억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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