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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제32화 골동품 비화 40년(29)|<제자 박병래>박병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끝내 못 얻은 무호 그림>
현재 진명 여자고등학교에서 궁정동쪽으로 난 샛길의 골목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목조2충의 아담한 일본식 집 한 채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옛 모습이 전혀 뒤바뀌고 말았으나 해방 전, 그러니까 무호 이한복씨가 작고하던 해까지 살던 집이었다.
서예나 골동이 전문이 아닌 사람에게는 이한복씨는 매우 생소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는 참으로 비범한 재주를 갖춘 분이었다.
자기가 손수 짓고 살다 간 궁정동 그 집에 들르게 되면 언제나 일본차를 내놓고 접대했는데 어느 누구에게나 호인격의 인품을 드러내 보여 세상에 그렇게 태평하고 그저 좋은 분도 드물 것이다.
이한복씨는 오세창 선생의 뒤를 잇는 전각의 명인이라고들 하나 서예는 물론 화필에까지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한데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뛰어난 감상 안에는 어느 누구도 뒤따를 사람이 없었으니 우리와 상종하게 된 기연도 따지고 보면 서화와 골동의 감상에 선구자격이었던 때문인가 한다.
그때 무호와는 김용진씨 박영철씨 장택상씨 등이 가까이 지냈는데 매일 모이다시피 하면서 그날그날 산 골동이나 서화의 평가회 비슷하게 담소를 하고 상을 주며 물건을 교환하고 참으로 재미가 있게 세월을 보냈다.
무호 이한복씨를 특히 감싸준 분은 작고한 진명 여학교의 교장을 지낸 이세정씨였다.
무호는 동경미술학교를 나온 후 이세정씨의 후의로 진명 여학교에서 도화를 가르치면서 자기취미에 전념하였다.
형세가 그토록 극빈한 처지는 아니나 여학교 훈장으로 항상 주머니가 가벼웠으므로 값나가고 좋은 물건을 못사는 것이 못내 한이었다.
그래서 목기며 벼루집 등 자기 취미에 어울리고 아담한 물건만 모았다. 그가 가진 물건 중에 개발모양을 한 다리가 달린 책상이 무척 부러웠었다.
한편 그의 궁정동 집에 있었던 아담한 석탑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어느 누가 무어라도 이한복씨의 감상안만은 도저히 따를 만한 이가 없었으므로 그의 눈길을 거처야만 서화 건골 등이건 제 빛을 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의 동경미술학교교장 정목이란 일본인이 일부러 그를 찾아와서 감점을 의뢰했던 일이 있었다. 또 나의 전문과는 거리가 좀 멀지만 청나라 말기의 조지겸이나 오창석의 경지를 우리나라에 이끌어 들인 인물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도 결코 과찬은 아니었던 듯하다.
골동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이한복씨도 간혹 본의 아닌 변을 만나야 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가 작고하기 얼마 전에 강화도의 치과 의사 박모씨의 유품인 고려청자 여러 점을 사들인 일이 있었다. 박모씨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이 함석태씨와 이한복씨 등에게 그의 유품인 고려청자를 정리해 달라해서 몇몇이 나눠 가진 모양이었다.
나중에 어느 경로를 통해 들어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그 미망인은 너무 싸게 팔았다고 하면서 도로 내놓으라고 해서 모두 물건을 되돌려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원래 고려청자는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천만다행으로 그 물건을 안 샀기에 봉변을 면했다.
이러나 저러나 다 골동을 좋아하는 탓으로 생긴 일이겠지만 하옇든 이한복씨의 감식안은 거듭 찬탄할만한 것이어서 창랑도 무조건 그가 좋다고만 하면『무호가 진짜라고 하는데』하면서 미더워해 마지않았다.
무호가 내게 진 빚은 영영 갚지 못한 채 작고하고 말았다.
생전에 나는 이한복씨에게 그림 하나만 그려 달라고 간청을 한 일이 있었다.
나의 청탁을 받고 정성 들여 선면 하나를 그렸던 모양이다.
그것을 학교의 당직 날 말린다고 밖에 놓아두었었는데 바둑을 두느라고 그대로 놓아두어 깜박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것이 아마 여름철이었다고 기억하는데 하여간 갑자기 억수같이 소나기가 퍼부으면서 채색한 안료가 빗물에 흘러내려 그림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것이라도 좋으니 내가 달라고 부득부득 졸랐건만 종내 다시 그려 주겠노라고 하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나는 집을 지은 다음 화상에 나온 그의 글씨와 그림을 적지 안이 사들여서 갖추어 놓았다. 전쟁통에 방안 밖으로 사방이 찢기고 더러워져 다시 바르는 통에 귀중한 전서를 상당히 못쓰게 만든 셈이다.
무호가 세상을 떠나고 현재 영빈관 자리에 있는 박문사에서 영결식을 가졌을 때 동호의 여러 친우들이 여간 안타깝게 여기며 그를 보내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현재의 영빈관 입구에 있던 커다란 누문 추녀 끝에서 땅에까지 닿는 만장이 걸렸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그때 글씨는 손재형씨가 썼었는데 우리가 무호를 보내던 정성이 그렇게 지극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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