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카잘스」-96세로 타계한 금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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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96세를 일기로 22일 세상을 떠난 「첼리스트」며 지휘자·작곡자인 「파블로·카잘스」옹은 전설적인 음악의 상징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금세기 최고령의 음악가였던 그는 거진 1세기를 예술과 함께 살아왔으며 또한 조국 「스페인」의 독재정권에 항거한 자유의 투사이기도 했다. 『은퇴란 바로 죽음 시작이며 나는 결코 은퇴하지 않겠다』고 생전에 말했던 「카잘스」옹은 결국 죽음에 의해 영원히 은퇴하고만 것이다.
그는 「첼로」를 독주악기로서 「바이얼린」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는데 크게 공헌했고 「카잘스·트리오」로 명성을 떨쳤으며 또 자신의 「오키스트러」를 조직, 작곡과 지휘로도 많이 활약했다.
「카잘스」를 말할 때 흔히 「카스터」장군이 이끄는 미 제7기병대가 「리를·빅·흔」전투에서 전멸하던 해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1876년12월29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부근 「벤드렐」에서 교회 「오거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4세 때부터 교회성가대에 나갔으며 「바이얼린」과 「피아노」를 배웠고, 10세 때 「첼로」를 시작했다. 15세 때 「스페인」왕실에서 연주했고 이어 영국의 「빅토리아」여왕 앞에서, 그리고 「모스크바」와 「뉴요크」에서도 연주했다.
『나는 11세 때 예술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가장 잘 이용한 것 밖에 없다』고 그는 말하기도 했다.
1939년 「스페인」 내란이 끝나고 「프랑코」장군이 승리하자 그는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자의에 의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다시는 「프랑코」가 독재하는 조국이나 또는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가 거부되는 어떠한 나라에서도 연주를 않겠다』고 말했었다.
「스페인」을 떠나 「유럽」에서 연주생활을 하던 그는 57년 그의 어머니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에 정착, 「카잘스·페스티벌」을 열었고 그와의 협연을 위해 전세계의 음악인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바이얼리니스트」 「자크·티보」 및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트」와 「팀」을 이루어 금세기의 가장 유명한 「트리오」가 되었다.
57년8월 80세의 「카잘스」는 「푸에르토리코」의 「첼로」학도며 그보다 60세나 연하인 20세의 「마르티타」와 네 번째 결혼했다.
『우리의 사랑은 나이를 초월한 심오한 사랑』이라고 말한 그는「마르티타」와 같이 보낸 만년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술회했었다.
이의 첫번째 부인은 30세 때 결혼한 「포르투갈」의 「첼리스트」 「길레르미나」였으며 두번째는 미국의 가수 「수전」, 그리고 세 번째는 「프란시스카」였다. 그러나 그는 네번의 결혼에서 아이는 하나도 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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