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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문경 조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 나라는 산국이며 고개의 나라.
이 고개에서 우리의 조상들은 석별의 정을 나눴던 것이다. 고개만 넘으면 타국이나 다름없는 낯선 땅인지라 떠나는 자식이나 보내는 부모는 고개 마루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문경 새재는 천만 뜻밖에도 외딴 섬인 『진도 아리랑』에 『문경 새재는 왼 고갠고, 구부야 구부 구부 눈물이 난다』라는 한 귀절이 나온다.
일찌기 영남 사람들은 이 새재를 넘거나 아니면 추풍령이나 죽령을 넘어 서울 땅을 밟았었다.
모두가 해발 6백m의 첩첩산중. 이밖에는 길이 없고 그나마 새재는 태산준령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가장 험난한 고개로 천하에 악명이 높았던 것이다.
짐승이 나타나는 것보다는 장장 30리 고개를 무대로 하는 도둑들이 출몰하여 행인을 괴롭힌 이야기는 기록에도 남아 있다. 이 고개를 넘는 부녀자들은 동행인이 모이기를 아래에서 기다려 남자들 틈에 끼여 산길을 넘었다고 적혀 있다.
그런가하면 『새재 박달나무는 복도 많아 처녀 손길에서 다 논다』라는 민요도 있다. 이 두가지 노래에서 조령 고개가 어떠한 곳인지를 가보지 않더라도 대강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
박달나무는 단단하여 홍두깨나 다듬이 방망이가 되어 전국에 팔렸는데 실로 조령이 그 공급원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 새재는 다시 건국 제1의 아름다운 경치 좋은 고개로 등장했다.
이왕가 소유의 우수한 삼림이 아직도 잘 보호되어 있으며 완만한 경사길을 넘는 이 새재 길은 회고적이며 즐거운 산길로서 하이커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고개라기보다 오히려 좋은 계곡이며 역사적 유물을 간직한 대 자연공원이라고 부르기에 알맞은 지역이다.
문헌에 의하면 이 새재 길이 국도 (물론 현재의 오솔길이지만)로 지정된 것은 이조 제3대왕 태종 (1401∼1419년) 시절의 일이다. 처음 이곳을 찾는 이는 모두 놀라겠지만 새재에는 3개소의 관문이 있다.
관문은 국사범이나 큰 죄인의 통과를 취체하는 곳이며 수문장을 다스리던 사령관의 관사 터가 지금도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에 옛날 모습대로 남아 있다.
이조 숙종 (제19대) 때에 축성한 3곳의 성은 남북으로 18리, 총 둘레가 실로 1만8천5백9보(보는 약 1「피트」)라고 기록되어 있다.
각각 관문은 물론 성과 연결되어 있는데 제1, 제3관문이 남북에서 외계와 통하고 있다.
지금은 많이 훼손되었으나 관문 (4각형의 화강암으로 아치형)은 그냥 남아 있고 특히 제1관문은 옛날 그대로 누각을 이고 있다.
이곳은 단풍의 명소로도 손색이 없는 대삼림 지대이다. 맑은 계류가 흐르고 청초한 자연의 경치를 과시해 주어 역사를 회고하는 일석이조의 장소로서 한번 방문키를 권장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서 소서행장에게 쫓긴 신립 장군이 충주의 달내강 탄금대에서 배수지진을 치다가 전사한 이야기는 누구 나가 다 아는 사실.

< ◇교통·숙식>마장동서 직행 버스로 수안보서 하차|여관은 없고 민가 몇채 있어 숙식 가능
▲서울∼충주. 기차도 있지만 마장동에서 떠나는 서울∼점촌간 직행 (30분 간격)으로 충주경유 수안보온천에서 하차 (7백74원·4시간 소요), 충주∼수안보는 50리에 1백5원. 수안보에서 조령길 입구인 수옥정 폭포까지는 20리인데 남쪽 (문경·점촌 방면)으로 내려가는 버스면 아무 거라도 무방. 처음 제3관문이 나타나는데 길은 아주 좋다. 현지에서 다시 확인키를 제1관문을 지나 국도 (서울∼점촌)까지는 약 20리쯤 (원길은 30리지만, 수옥정 경유는 짧아진다). 국도에서 문경구읍은 5리, 교통이 4통5달이다.
▲새재길에는 중간쯤에 손님을 재우는 집이 한 채 있고 민가가 몇채 있어 숙식도 가능한 셈. 단 여관은 없는 곳이므로 숙박은 문경구읍 (큰 마을)이나 수안보온천에서 하도록. 수안보에는 호텔로부터 여인숙까지 다수 있다. 욕실이 있는 여관은 실료만 8백원에서 1천원쯤. 호텔은 1천8백원∼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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