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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제자 박병래>|<제32화>골동품비화 40년(3)|박병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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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골동열의 여명기>
전해들은 얘기와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우리나라에서 골동에 대한 인식이 처음 생기게 된 것은 아마도 일인들이 이 땅에 발을 디딘 이후부터인가 한다.
도자기 기술이 일본이 전래한 것은 벌써 오래 전 고려시대부터였고 문서를 통해서 보면 일본의 족리 시대에는 도공이 많이 건너가서 오늘날 전해 오는 일본의 전통 도예 가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지만 일본의 뛰어난 도공은 대대로 그 비법을 자손에게 전해서 가일층 발전시켜 왔다고 하나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흔적이 없다.
전국 도처에 고려는 물론 이조의 관 요가 흩어져 있으나 도예는 그 당시 관 수와 양반 가의 일용품을 조달하기 위한 기술이었을 뿐이지 도공의 천재적 예술의 재능은 인정을 안한 모양이다. 그래서 관 요에는 당대의 일류 화원이 배치되었어도 도기에 그린 그림이 누구의 것인지 확실히 밝혀지는 예가 드물다.
하여간 이런 연유로 해서 이조의 도자기에는 도공의 애수가 어리고 비록 신분이 높은 귀인의 일용에 조달했을 망정 그릇에 어리는 서민의 정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자에는 똑같은 모양과 공의 작품이 둘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특출한 도공이 기가 막힌 물건을 만들어 냈다고 해서 빛을 보고 그 기예가 길이 전수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요지에서는 도공의 사기가마에서 자기 그릇을 들고나올 때 감독하는 자가보고 썩 잘 된 물건이라고 판단되면 망치로 깨뜨려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상급관청에서 그 물건을 보고 다음에 그만 못하면 도공을 불러 다가 매를 때리거나 목을 메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평균으로 중간 제품만 상납했다고 한다. 이것은 일인이 지어낸 말인지 정작 애수에 어린 도공의 수난사였는지 하여간 모를 일이다.
한데 도공이 이름을 길이 남기지 못하고 그 시대 그 시대의 관노로 일종의 소모품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일인들이 소위 「삼도」라 부르며 다기로 중히 여기는 분청사기만 해도 그렇다. 처음에는 그 형태가 고려청자보다 원시적이고 멋대로 되었다고 해서 더 오랜 시기의 것으로 알고 좋아했다. 그러다가 합방 후 우리나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요지를 발굴하고 그릇에 새겨진 명문을 판독하고 사서를 뒤적이고 해서 겨우 조선 초기의 것임을 알아냈다.
일본인들은 저희 나라 본원 사에 신주단지 모시듯 괴어 놓고 신기라고 자랑해 마지않던 명물다완도 실상 우리나라의 분 청임을 알고 놀라서 기절초풍을 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고래로 도기에 담긴 도공의 혼을 몰인정하게도 무시했던 까닭에 조상의 그 잘난 솜씨를 보전하지 못하고 도리어 일인들이 날뛰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여하간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도자기라면 죽은 사람이라도 깨어날 듯 사족을 벌벌 떨었다 . 바로 그 실례로는 조선의 도공을 마구 납치해 간 임란 후 우리 조정에 간청을 해서 부산에 요를 열고 구워 간 사실을 들 수가 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무진장하게 널린 질이 좋은 고령토와 한인의 그 소박하면서도 담담한 신기를 못내 부러워하였다. 방금 말한 부산 요에서는 합방 후까지도 대량으로 구워 낸 듯 그전에 골동 가에는 왜 색을 가미한 유사품 백자가 흔히 나돌아 이것이 부산 요의 출신이라고 짐작하면 되었다.
일인들 가운데 이 땅에 와서 도자기를 음양으로 대량 실어 내 간 자가 부지기수지만 그 중에도 연구에 뜻을 두고 상당히 조사한 사람이 많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넘어간 도공의 이름은 일본의 여러 사서에 남아서 오늘날까지도 연 맥을 이어오는데 일본에서 간청하다시피 해서 초빙 해간 그 도공의 행적이 우리나라 기록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도자기를 많이 만들면서도 도공의 존재를 무시한 게 틀림없다. 고려에서 조선에 연하는 도자기의 형태를 보면 대체로 실용을 위주로 한 것 같았다. 불교를 으뜸으로 숭상한 고려 당시에 청자가 지극히 사치품인 것은 물론이지만 향로라든지 기타 불기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보아 그 당시 사회상과 적절히 호흡하는 실용 위주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분청사기는 어디까지나 실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탕 기나 병 등 일상 용구로 필요 불가결한 것임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특히 백자의 항아리는 사대부뿐만이 아니라 서민도 널리 상용할 수 있는 용기였다.
다만 신분제도가 엄격해서 서민들이 막 굴리기에는 조금 고급에 속하는 사치품을 관 요에서 공급했을 따름이다. 중기를 거쳐 후기에 이르면서 특히 발달하는 문방구도 문인의 아 취와 적당히 타협하는 체 하면서 실상은 전혀 무용을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다.
주자학이 크게 행세하고 도처에 서원이 득세를 하는 세상에 지필묵을 부 수하는 용기들은 필수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실생활의 용구로만 도자기를 대하여 온 우리네 조상과 도예 기술이 너무나 후진이어서 감히 실용의 이기라고까지 생각은 못하고 다기 등 일종의 애완물로 여겨 온 일인 조상과는 그 발상부터가 다르다. 그래서 조그만 이상한 물건이라도 그네들은 신기니, 명기니 하며 신주단지 모시듯 대대로 전세의 보물로 삼았다.
그래서 이미 한일합방 전부터 우리나라를 드나드는 일인들은 다른 목적 외에 우선 도자기에 눈이 멀겠다. 많은 무뢰한들이 개성 근처의 고분을 벌집 쑤시듯 하고 날뛰는가 하면 고관대작은 그 나름대로 도자기든 공예품이든 무엇이고 악마 구리 떼 모양으로 거두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네들의 남긴 일화를 뒤져보면 다 사실로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는 전세 품 이외에는 절대로 사기 그릇을 그다지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 없었다. 또 고려자기는 고분이 아니면 산사에 비장 된 것뿐이었으므로 최초의 골동품 수집 열은 이등박문이가 이것저것 막 긁어 가기 시작할 무렵부터 비롯한다고 보아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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