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경주 백55호 고분의 출토품들|수준 높은 회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서기 500년 지증왕 때를 전후해 신라의 기세를 가장 잘 표현해 보인 것이 그림이요, 그 중에도 천마도이다. 구름을 밟고 달리는 이 백마는 갈기를 곧추 세우고 꼬리까지 서슬이 서있어 매우 힘차고 떨치는 모습이다. 급격히 부력을 쌓고 강력한 지배 계급을 탄생한 뒤 말을 달려 변경을 넓히려는 바로 그 기상이라 풀이되는 것이다.
김원룡 서울대 박물관장은 『당시 사회에서 말의 역할은 매우 커서 보화와 같은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신라가 백제에서 말을 들여오는 댓가로 황금과 구슬·명주 등을 보냈다고 했는데 그 말이란 누구나 탈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지배 계급의 지배력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마패에 그런 말을 그린다는 것은 강력한 지배자의 징표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 더구나 그것이 흰말이라는 점은 매우 제한된 지배자임을 지적한다. 일찌기 신라사에서 맨 먼저 흰말과 더불어 왔다는 사람은 시조 박혁거세이다.
나제 임금이 모여 회맹단을 쌓고 하늘에 고하여 화평의 뜻을 약속할 때도 백마로써 제물을 삼았다. 곧 이러한 얘기는 백마가 하늘의 사자임을 의미하며 고대 신라 사회에서 왕을 천손이라 여겼던 것과 일치한다.
말의 배가리개에 그린 천마도 이외에도 말 그림은 모자차양형 채화판에 또 나타난다. 거기 8조각에 삥 둘러 기마 인물도를 그렸는데 갈색 마와 백마를 하나씩 걸러 배치했다. 다른 한 장의 채화 판은 짐승머리를 한 서조로 역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그림들은 신라인의 사상과 사회 발전을 설명해 주는 자료가 되거니와 특히 회화 수준을 보여주는 최초의 유물이란 점에서 미술 사적으로 획기적인 수확이다. 이점 국립박물관 최순우 학예 연구실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이것은 공예품에 그린 장식화이긴 하지만 종래의 고분 벽화와 다른 성격의 화적으로서 중시된다. 율거의 노송도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회화 작품으로서의 풍경화도 있었으리라 생각되며 그것은 「캔버스」나 채료에 있어서도 석벽에 그릴 때와는 다소 다르지 않았을까.
고대의 화판은 천 (포)이 주로 사용됐을 것이며 그밖에 가죽이나 이번 자작나무 껍질처럼 목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채료는 주·황·흑·녹·백 등인데 계란 노른자나 아교, 혹은 식물성 기름 (밀다회)으로 개어 발랐다고 보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 그림에서 우선 주시해야 할 것은 자신 있고 확실하게 그은 선의 필치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세련된 솜씨이다.
천마도는 고구려의 무용총 (3∼4세기 때 것) 천장 벽화에서도 어렴풋이 나타났는데 물론 그것은 백마는 아니다. 더 소급해 따진다면 2천년전 여인의 시체가 그대로 발견된 중국 마왕퇴 고분의 목관에 그린 말 그림과 상당히 상통되는 점이 있다. 나아가 이 천마도는 서역적인 냄새조차 없지 않다는 점에서 문화·양식의 흐름을 통하여 신라가 외부와 광범위하게 접촉하고 있었음을 알만하다. 그러면서도 신라의 개성은 소박하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독자적인 특성을 가꿔가고 있었던게 아닐까.
김원룡 박사는 『문화 교류 면에서 삼국의 문화는 한나라 계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고 그래서 삼국이 공통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번 경주 고분의 그림에서 느끼는 것은 아무래도 고구려 벽화와 다소 다르다는 점이다. 기마 인물도가 매산리 사신총의 그것과 비슷하고 서조가 우현리 중묘의 주작과 언뜻 같아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신라 나름의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고구려의 말은 목을 세우고 꼬리를 뒤로 뻗친 것이 특징인데, 이번 기마 인물 도는 꼬리를 수평으로 하고 또 그 꼬리를 그림에 있어 붓끝을 치켜올린 듯한 솜씨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