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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곳 잃은 노인들-육교 밑 그늘에 출입금지 벽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아스팔트·정글」속의 노인들은 쉴 곳이 없다. 눈이 빙빙 돌 만치 바빠진 세상살이에 끼어 들자니 이미 기력이 쇠했고 아들녀석은 제 식구나 끼고 돌아 말발이 서지 않는 처지. 건넌방 신세도 진력나지만 그렇다고 싱그러운 자연이라도 가까이 있는가. 고독 속에 소외된 노인들은 끼리끼리 경로당을 찾게 마련. 그나마 없는 곳엔 어디 빈터에라도 나앉아 바둑·장기에 시름을 잊어본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4동 7순 할아버지 20여명은 이웃의 빈터에다 돗자리와 「비닐」장판을 깔고 앉아 『여긴 우리자리다』라고 주장하다가 『천만에. 저희가 사용료를 냈으니 함부로 차지 못합니다』고 맞선 사용주와 시비를 벌이고 있다. 한뼘의 「사랑방」을 둘러싸고 일어난 마치 어린이의 땅따먹기 같은 싸움질은 서울에서나 볼 수 있는 일.
시비의 발단은 지난 1일 이웃 신답극장 측에서 건물입구 육교 밑 그늘 땅 5평에 노인출입금지령을 내린데서 비롯. 복잡한 시장과 극장입구를 정리, 소방도로를 확보하라는 구청의 지시에 잇단 조치였다.
그러나 노인들은 대뜸『고얀 놈들 우리놀이터를 뺏다니. 제 집에는 할애비가 없어』라고 거세게 반발, 빈터를 빌려주든지 경로당을 지어놓으라고 호통이 대단하다.
문제가 된 거리의 사랑방은 1년 전 5층 높이의 극장과 시장을 개관한 흥룡산업(대표 이영보·34)측이 지난 3월 도로 면에서 건물2층 사이를 바로 잇는 길이 20m, 너비10m쫌의 육교를 만들자 그 밑에 생긴 5평 남짓한 공터. 올해 따라 유난히도 더웠던 서울의 삼복 속에서도 이곳에는 곧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지난 5월 초순부터 성인영 할아버지(71·답십리 4동497) 등 동네노인 20여명이 지팡이를 끌고 찾아들어 극장「포스터」구경이랑 시장 돌아가는 모습을 즐기다가 신문지를 깔고 앉아 다리를 쉬었다. 마침 건너편 고려약국 주인 김광규씨(33)가 돗자리 두 장을 희사했고 백유보 할아버지(74)는 집에서 장기판을 들고 나왔다. 노인회 대표 격인 성씨가 앞장서 쌈지든1∼2백원씩 모두 7천여 원을 거둬 돗자리 20장과 「비닐」장판 40자를 사서 까니 제법 그럴듯한 사랑방이 됐다. 장기판 2개, 바둑판 2개, 화투3벌까지 마련했다.
바둑 한판에는 으레 10여명의 노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묘수 짜기에 골똘했고 장기훈수는 곧잘 늙은 목청을 돋우게 마련.
새마을 담배 한 개비 내기 화투판도 있고 시조를 옮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손주 녀석 자랑에서부터 『내 소싯적에는 말씀이야』고 시작되는 허풍기 섞인 젊은 추억, 세상 돌아가는 얘기 등 온갖 화제와 정보가 스스럼없이 나눠지곤 했다. 이럴라 하면 합죽선을 부칠 겨를도 없이 삼복더위는 비껴가고 늙은이의 하루는 재미있었단다.
넉넉잖은 살림, 답답한 건넌방 신세가 비슷해서일까. 노인들은 통성명 없이도 곧 죽마고우 기분을 내고. 날마다 거르지 않던 이가 뜸하면 타계한 것. 이원만 할아버지(70)는 『올 여름에도 셋이나 돌아갔어. 우리도 곧 뒤따를 걸…』하면서 인생무상이라는 눈치.
고요하던 거리의 사랑방에 회오리바람이 불자 노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차피 찬바람이 불면 집안에 틀어박힐걸 『그 새를 못 참아 몰아내다니』 -성 노인은 흥분하지만 속셈은 경로당이라도 마련하자는 것.
젊은층도 노인들을 위한 놀이 방을 마련해드려야 한다고 믿고 있지만 어느 누구 선뜻 나서는 이가 없는 것은 서울이기 때문일까. <김재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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