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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소싸움|서부 경남지방의 민속놀이|묘기백출의 불꽃튀는 대결| 글 김형배 기자<진주 주재>·사진 이창성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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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황소 53마리 출전, 3일간 열전>
『받아라』. 양쪽 응원자들이 황소의 고삐를 풀어주면서 소리 지른다. 상대방을 응시하던 황소들은 한 걸음 다가서 이마를 맞대고「찬스」를 노린다.『받아라』『찍어라』『밀어라』『옳지, 잘한다』-옆에 붙어선 양쪽 응원자들이 쉴새없이「링·사이드」의 권투「코치」처럼 손짓·발짓으로 소의 기세를 돋우어 준다.
1백40관 이상의 거대한 황소의 뿔이 불꽃을 튕기며 밀리고 밀고 일진일퇴 속에 소주인과 관중은 열광하며 손에 땀을 쥔다.
진주지방의 고유한 민속놀이인 소싸움이 올 가을에도 역시 추석 명절놀이로 진주시 공설운동장에서 벌어졌다. 진양·함양·거창·의령·창원·고성·김해 등 서부 경남에서「내노라」하는 황소 53마리가 출전, 글짜 그대로 자웅을 결하고 일대승부를 펼쳤다.
연3일(12∼14일) 계속된 소싸움으로 공설운동장은 연일 흥분의 도가니. 흥겨운 농악이 푸른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지면서 공설운동장 동·서 양쪽 문이 활짝 열리면 머리에 붉은 베 헝겊을 감은 우람한 황소가 한 마리씩 모습을 나타내고 서로 상대방을 노려보며 한바탕 포효한다.
응원자의 손에 이끌린 황소는 우선 마을 사람들이 박수치는 운동장 주위를 유유히 한바퀴 돌아 운동장 중앙에 3m 간격으로 마주선다.

<시간제한 없고 3체급별 대진>
싸움에 시간 제한은 없으나 대부분의 경우 10∼15분 정도면 승패가 가려지고 긴 경우에는 1시간이상 걸릴 때도 있기는 하다.
소싸움도 체급별로 붙는다. 1백40관 이상(7∼8살)은 갑종 1백관내의(4∼5살)는 을종, 50∼60관(3∼4살)은 병종. 그러나 몸무게뿐만 아니라 뿔의 형태, 몸의 골격이 체급판정에 가미되는 것이 다르다. 이른바 달관심사라는 것이다.
을·병종 경량급은 응원자의 신호와 함께 화급하게 맞붙어 단판 승을 내 싸움이 금방 끝나지만 갑종 중량급은 3∼5분 동안 쳐다보며 함성과 눈싸움으로 탐색하며 지구전을 벌이는 것이 상례.
소싸움이라고 힘만 갖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적 본능에 따른 무궁무진한 기술이 펼쳐진다.
박치기는 흔히 쓰는 수법중의 하나다. 맞대고 밀던 이마를 갑자기 떼고 앞이마로 상대방의 앞이마를「헤딩」하는 것. 경기 초반에 힘 빼기 작전을 자주 쓴다.
뿔 치기는 비녀 뿔이나 육뿔 소가 흔히 갖고 있는 특기. 안으로 구부러진 뿔로 적수의 뿔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슬쩍 뿔을 걸어 목을 돌리면 힘 약한 상대방은 쓰러지고 만다. 흔치는 않지만 뿔이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대결 피하면 암소 넣어 싸우게>
「뜨기」는 묘기중의 묘기. 앞발이 짧은 소가 갑자기 앞발을 구부리면서 상대의 목 밑에 뿔을 들이대고 위로 치켜든다. 이 수에 걸리면 꼼짝없이 머리를 들게되고 이틈에 적수의 뒤로 돌아가 공격하면 도망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도망가는 것은「녹·다운」과 같은 것. 승자는 영예의 KO승을 차지하게되는 셈이다.
너무 신중해서 15분이 지나도록 맞붙지 않는 경우가 다. 이때에는 암소 한 마리를 살벌한 경기장에 슬쩍 들여보낸다. 암소 뒤를 따르는 것은 본능. 둘은 암소 뒤에서 어쩔 수 없이 맞붙게되고 암소는 그 순간 싸움만 붙여놓고 줄행랑친다. 암소를 들여보내도 싸움하지 않으면 양쪽 다 기권으로 처리된다.
아무리 힘과 기를 겸비해도 신사도에 어긋나면 실격이다. 싸움 개시 후 장내에서 2회 이상 추행하면 실격. 방뇨·방분 뿐만 아니라 방사행위가 추행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소싸움의「카운트다운」은 2분이다. 후퇴한 소가 2분 이내에 되돌아와 공격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주·부심 3명은 패배를 선언한다.
투우경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내력을 알지 못한다.

<40여 년 전통 일제 땐 단결의 계기>
진주시 투우협회 총무이사 장지석 씨(57)는 백제와 싸워 이긴 신라의 전승 기념잔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내려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40여 년 전, 천석군·만석군 부농들이 시작했다고 한다. 해마다 진주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졌다. 백사장에서 싸우던 소가 물 속에 들어가면 심판과 응원자까지 물 속에 같이 들어가 수중경기를 벌였다고.
40년 전 한창 전성기에는 진주의 사자 소는 뿔 치기로 이름났고 기습에 능한 밀양의 번개 소, 마산의 호랑이를 잡았다는 담보 소, 전신에 피를 흘리면서도 후퇴를 모르는 임전무퇴 덕석 소, 10리 밖까지 소리가 들렸다는 범 소 등 군웅이 할거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갑종 1등만 하면 마을 사람들이 소 주인을 소등에 태우고 시가를「퍼레이드」하고 돌아갔다. 소 주인은 양조장을 전세 내 풍년과 부농임을 과시하기도 했고, 이긴 소의 값은 배로 뛰었다.
소 주인들은 경기를 앞두고 1개월 전부터「스태미너」식으로 계란과 밀·보리·풀 등을 먹이고 연습에 갈증나면 인삼달인 물을 먹일 정도였다는 것. 그러나 콩은 싸울 때 열이 난다해서「터부」.
40년간 심판을 맡아 왔다는 곽병규 노인(64·올해에도 주심)은『왜정 때 우리 민족이 단결하는 계기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투우를 한동안 못하게 해 산에서 몰래 숨어했다』면서『장대한 황소가 드문 것은 해마다 민속놀이인 투우경기가 소홀히 취급되는 때문』이라고 서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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