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120년 전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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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인간이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과거에서 배우기 위해서다.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보고, 거기서 얻은 교훈으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년을 맞아 유럽 학계와 언론이 1914년을 재조명하고, 2014년 갑오년의 입구에서 우리가 120년 전 갑오년을 생각하는 이유일 것이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가 120년 전과 닮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시대의 흐름과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해 국권침탈의 수모를 겪었던 그때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강대국 사이에서 미묘한 선택을 요구받고 있고, 국론이 갈라져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은 비슷하다. 하지만 한국은 무지몽매한 약소국 조선이 아니다. 글로벌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이다. 그럼에도 120년 전의 암울한 상황을 떠올리게 되는 결정적 이유는 불합리한 한반도 분단 체제 때문이다.

 남북이 지금과 같은 적대적이고 소모적인 대치 상태를 지속한다면 한반도는 미·중 양강 구도의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재무장과 군사대국화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는 일본이 동북아에서 일으키고 있는 풍파에 시달릴 가능성도 크다. 북한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운신 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7500만 민족의 현재와 후손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당파적 이익에 매몰돼 민족적 비극을 자초했던 120년 전의 우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신년사의 거의 절반을 경제에 할애하며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북한의 사정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일 수 있다. 북한의 막가파식 도발 가능성에 대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이 내미는 손을 잡는 용기와 아량도 필요하다. 남북이 힘을 모아 숨막힐 것 같은 한반도 상황을 주도적으로 타개해야 한다. 그 실마리를 5·24 조치의 해제에서 찾는 것은 불가피하다. 개성공단 국제화와 나진·하산 프로젝트 투자를 위해서도 5·24 조치의 해제는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2010년 천안함 폭침의 책임을 물어 이명박정부는 북한과의 인적·물적 교류를 전면 중단하는 5·24 조치를 취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북한이 사과하고,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우리가 일방적으로 5·24 조치를 풀기는 어렵다. 북한이 먼저 물꼬를 터줘야 한다. 구체적인 방안은 남북이 물밑접촉 등을 통해 협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운명은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주변 정세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끌려갈 것인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 것인지,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북한이 곤경에 처해 있는 지금이야말로 박근혜정부가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설 타이밍이다. 그것이 120년 전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