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냉전의 마지막주역 「울브리히트」사망이 뜻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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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해설>전후25년 냉전주역중의 하나였던 「발터·울브리히트」의 사망으로 냉전의 마지막 상징인물이 사라졌다. 완고한「스탈린」주의자, 철저한 공산주의자로서의「울브리히트」의 「이미지」는 동서화해의 물결에 밀려 퇴색했다가 단순한 추도의 대상이 돼버린 것이다.
양복점 재단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젖어들었던 그는「히틀러」의 집권기간 중 소련에서 반「나치스」운동을 벌였다. 초기 동구집권자들이 모두 그렇듯이 「울브리히트」도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정권을 잡았다.
동구 지도자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자기 나름대로의 「마르크스」주의를 구현하러 했던 「울브리히트」는 서방세계와의 접촉을 지극히 꺼렸다.
2차 대전 종전직후 동서관계를 험악하게 했던 「베를린」 봉쇄, 「베를린」 장벽구축, 소련의 「체코」 침공 등의 배후에는 언제나 「울브리히트」의 입김이 서려 서구여론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베를린」장벽의 구축은 「울브리히트」 장벽이라 일컬을 만큼 그의 이름은 악명의 대명사처럼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독의 체제적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매년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해가던 수천 명의 인적자원의 유출을 방지했을 뿐더러 동독의 사회안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비록 「스탈린」 주의적인 통치로 국민생활을 억누르기는 했으나 1천5백만 명의 인적자원으로 전후독일의 폐허에서 동구에서는 소련에 다음가는 제2위, 세계 10대 공업국의 하나로 동독을 이끌어 올렸다는데서 「울브리히트」가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탄탄했던 그의 권좌도 서구와의 교류를 반대했던 완고한 보수주의가 동서화해의 길로 내닫는 소련의 정책과 충돌, 동·서독 기본조약협상을 계기로 소련의 압력, 당내간부들과의 의견불일치 등으로 궁지에 몰려 71년 당 제1서기의 지위를 「호네커」에게 넘기고 해빙의 물결에 밀려났었다. <김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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