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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금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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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신라금관은 한마디로 장엄하다. 백제금관이 정교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학자들은 나무가지 (수지)의 모양을 본뜬점에서는 공통된다고 말한다. 그 당시엔 수목이 「샤머니즘」의 대상으로 영물시되고 있었다. 이런 풍습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남아있다.
그러나 신라금관은 같은 나무가지의 모양일지라도 야생목의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는것 같다. 이것은 다분히 「아마추어」의 속안으로 본 인상이지만, 그 어기차고 쭉쭉 뻗은 가지는 어딘지 풍소에 자란 수목을 생각하게 한다. 백제금관은 이와는 달리 안온한 계곡, 양지바른곳에서 자란 나무의 형상이다. 거친데가 없이 잔잔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72년 부여에서 발굴된 무령왕능의 금관에서도 볼수 있었다.
이번에 경주155고분에서 발굴된 금관은 그 규모도 규모지만, 모양도 다소 특이한것 같다. 이번의 신라금관엔 나비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었다. 새 날개의 장식도 곁들여있다. 이것은 상당히 세련된 미적 감각이다. 그 섬세하고 멋들어진 장엄·정교의 미는 경이롭기 그지없다. 그것은 고대 신라인의 심상을 무언중에 나타내 보이는것도 같다. 무뚝뚝하고 당돌한, 그런 인상과는 판이한 일면이다.
신라는 사라라는 부락국가에서 시작되었다. 6세기초입엔 나라의 기틀이 잡혀 진흥왕(540∼576)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 낙동강을 건너 국토를 넓혔다. 한때는 그세를 함경도까지 뻗쳐 비를 세우고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적도 있었다. 이런 기상은 신나 미술에서도 엿보여, 늠름하고 훤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있다. 신라옥관들이 자못 대륙적인 기어의 인상을 갖고 있는것도 그런 단면이 아닐까 싶다.
어느 학자는 신라의 금관은 「유라시아」의 유목민족들이 숭상한 수목과 사슴(녹)을 도안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런「샤먼」의 관을 쓴 신라 임금은 그 정신적 위치도 짐작하게 한다.
신라는 그 미술의 원동력을 불교에서 주로 찾고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지배한 정신적 지주는 불교적 가치관에 있었을 것이다. 신라인의 건전한 기상도 말하자면 불교적 신앙의 표현이었을 것 같다.
임금이 이런 장엄한 금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군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시대사람들의 어떤 도덕적 수준을 나타낸 「심벌」(상징)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측도 하게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수있었던 정신력의 집중도 역시 그런 것이 아니었던들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에나 국민의 정신력을 한결같이 조화할 수 있는 동기는 그 나라의 도덕적 수준과도 관계가 깊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그런 생각은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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