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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꿈결 같은 봄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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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산비둘기 짝 찾는 소리 온 골짜기에 울리자 장끼 한 마리 질세라 푸드덕, 날아오릅니다. 함석지붕 위를 느릿느릿 걸어가는 늙은 고양이를 보고 개들이 호들갑을 떱니다. 대숲에 있던 참새들 놀라 한꺼번에 날아오르네요. 학꽁치떼 찾아든 선창으로 갈매기 무리짓고, 그 바람에 잠깬 배들이 눈을 비비는 봄날 정오 무렵.

세상은 무심히 늘어집니다. 무릎도 못 올라온 보리 옆에서 낮게 엎드린 냉이나 쑥, 개불알풀, 코딱지풀, 등대풀들, 논가의 미나리도 꾸벅꾸벅 좁니다. 평상에 드러누워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낮잠 청하려는데, 강아지가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 듭니다. 봄날, 까닭 없이 나른해지고 졸리는 게 어디 몸 뿐입니까?

마음도 봄볕 따라 풀어지고 흔들리고 흩어집니다. 바쁜 건 사람 사는 일. 깨진 유리나 새시 갈아요~ 싸게 싸게 팝니다~ 확성기를 단 트럭들이 차례로 지나가며 낮잠을 흔들어 깨웁니다. 설핏 깬 눈 한번 찌푸리면 그뿐, 봄볕에 안겨 스르르 잠이 듭니다. 꿈을 꾸어도 봄꿈을 꿈꾸다니…. 비몽사몽, 꿈결 같은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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