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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3)<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성시백의 영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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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47년5월에 남파된 성시백이 50년5월10일 ,검거될 때까지, 서울에서 벌인 그의 활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평가될 것이지만 그의 풍부한 정보계통에서의 경험 등으로 수준급 이상이었다고 분석되었었다.
그의 첫 거점이었던 2개의 신문은 한때 미국의 대한원조를 방해하는 공작을 치열히 벌였었고, 언론기관이라는 강점을 이용해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부문에 대한 기밀을 탐지, 돈암동에 있는 비밀무전 「아지트」에서 낱낱이 이북으로 보고했다.
앞서도 말했듯 성은 시내에만도 13개소의 「아지트」를 두었었다. 이것은 그가 중국에서 중공당의 간첩으로 국민당에 파고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거점을 자주 옮김으로써 수사기관의 추적을 차단하려는 속셈에서였다. 이것은 「푸락치」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취하는 자위책인 것이다.
성시백은 원래 일본의 중앙대법과출신으로 중키에 몹시 빈약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 얼굴 양쪽의 광대뼈가 두드러지게 튀어 나왔고, 눈은 움푹 들어가 흡사 영화나 소설에서 보는 「스파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서울에 나타났을 때 그는 최고급 외제 양복에 금테안경, 고급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었다.
당시 그가 타고 다니면 「뷰이크」승용차는 웬만한 장관도 타기 어렵다는 최고급으로, 그 차가 시내를 달리면 교통경찰이 다른 차를 세우고 통과시켜주었고 심지어는 그 당당한 위세로 통금시간에도 마구 다니곤 했다는 것이다. 당시 성은 북한에서 직접 돈을 날라다 쓰기도 했지만 「카바이드」등 각종 화공약품이나 북어·청어 등 생선류를 가져다 팔아 쓰기도 했다.
뒷날 성시백 사건을 수사했던 당시의 서울시경찰국 사찰분실 취조주임 김임전씨(현 서울거주)에 따르면 북한의 각종 물자들은 직접 서울에 전달되지 않고 진남포항에서 중국의 청도를 거쳐 부산 또는 인천항으로 돌아 들어왔다는 것이다. 당시 이러한 보급작전에 사용됐던 배가 4백50t급의 금비나환으로 성시백이 체포된 후 부산항에서 경찰에 압류됐다.
이러한 물건들은 도착 즉시 이 하부조직을 통해 각 시장으로 넘겨지고, 바꿔진 현금은 동대문 서울운동장 옆「뱀골목」(지금은 청계천이 복개되어 없어졌다)에 있는 이발소에 모여졌다는 것이다.
이곳은 성시백의 오른팔이자 부책이었던 김명룡의 주요연락처로서 재정관계는 주로 그가 맡아 처리했다는 것이다.
당초 성시백이 서울에서 각계각층의 인물과 접선, 공작을 펴고있을 때 시경 사찰과에서는 그 구체적인 조직이름을 몰라 「무명당 사건」이라 이름 붙이고 추적했다고 한다.
당시 수사「팀」의 주요「멤버」였으며 성시백을 직접 취조했던 김임전씨 증언에 따르면 성시백이 체포된 것은 작년 5월 10일 저녁 서소문동 소재 동아「호텔」(법원후문입구의 중국음식점 동아반점자리) 3층이었다. 그때 성시백은 5·30선거를 앞두고 국회에 좌익세력을 침투시키기 위한 마지막 공작에 안간힘을 쓰고있었다.
형사대가 3층 그의 방에 들어 닥치자 잠옷 바람으로 여러 가지의 서류를 정리하던 성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금새 태연자약한 태도로 순순히 경찰에 연행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취조에 들어가자 성시백은 완강히 묵비권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 어떻게 써도 좋으니 마음대로 써넣으시오』라든가 『자네들이 다 알 터인데 무얼 물어보고, 대답하고 할 것인가』…하면서 버티기 시작했다.
김씨에 따르면 당시 취조수사관들은 상대가 워낙 거물인지라 함부로 다루지 못하고 심경의 변화가 있기만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오만한 태도에 겨우 한다는 말이 『이 나라의 조사방법은 일정한 조서에 문답으로 기록해야 하는 것입니다』고 설명하는 일뿐.
10일 가까이 눈 씨름을 하는 동안 성시백은 하루 세끼를 모두 양식으로 먹었는데 점심과 저녁에는 반드시 우유와 빵을 곁들였다한다. 그래서 수사관들은 설렁탕 한 그릇에 끼니를 때우면서도 성시백의 음식은 당시 중앙청 앞에 있던 박「마리아」여사가 경영하던 광화문 「그릴」에서 꼬박 날라다 주었다. 그때 김씨가 우유와 빵을 먹는 이유를 물었더니 해방 전 중국에서 9년 동안 징역살이를 할 때 매일같이 호떡과 물만을 먹었기 때문에 버릇이 돼 그렇게 먹어야 속이 편하다고 대답했었다.
성시백이 처음 입을 연 것은 5월20일 새벽, 그는 열흘 뒤로 다가온 5·30선거를 통해 국회에 침투시킬 자기세력의 명단 등을 실토했다.
그가 이 공작을 위해 매수했던 인물이 민국당의 후보로 충남 보령에서 출마한 김승원(당시 구속)으로 그에게 1만4천8백 달러의 공작금을 주어 9명의 각 정당후보들을 포섭토록 했는데 당시의 수사결과에 따른 그 명단을 보면 용산 을구의 박건웅, 종로 갑구의 유석현, 부산 병구의 장건상, 성동 갑구의 김명준, 용산 갑구의 김찬, 서대문 을구의 윤기섭, 성북의 조소앙, 중구 갑의 원세훈 등 중간세력이었다.
이밖에 당시 상공부 전기국장 김모를 포섭, 그를 통해 영월발전소의 내부시설 청사진 등을 빼내 북쪽으로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이 적발되었을 때 검거된 인원이 무려 1백12명에 달했고, 막대한 자금과 그의 승용차 및 금비나환 등이 증거물로 압수됐다. <계속>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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