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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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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국미술2천년전이 며칠 전에 막을 내렸다. 자랑스러운 우리네미술의 유산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여간 뜻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옛 사람들은 그림을 신품, 묘품, 능품의 세 가지로 나누었었다. 신품은 『신운이 비동하여 인기로써 천공을 빼앗는 것』이라 했다.
묘품 이란 『묘필이 자재하여 의취가 횡생하는 것』, 능품이란 『고법을 잃지 않고 실물에 핍진한 것』물론 신품이 으뜸이고, 그 다음이 묘품·능품의 순으로 되어있었다.
이번 전시품 중에는 신품도 많았고 능품도 많았다. 그러나 어느 한 점이고 경흠을 금할 수 없는 우리의 자랑거리들임에는 틀림없었다.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에는 천재적인 회가 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켈란젤로」·「다·빈치』·「라파엘로」·「보티첼리」….
그들은 거의 전부 「피렌체」에 모여 있었다. 우연은 아니다. 당시의 「피렌체」의 실권자였던 「메디치」가의 당주「로렌초」는 영명한 군주인 동시에 뛰어난 예술의 보호자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특히 15세기를 「피렌체」예술의 황금시대라고 미술사에서는 말하고 있다.
사실과는 너무 먼 얘기다. 진상은 엉뚱하게 다르다. 「로렌초」가 예술진흥에 힘썼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로렌초」의 시대에「다·빈치」를 비롯한 우수한 예술가들은 차례로 「피렌체」를 떠나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예술이 황금시대를 맞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을 경제사가들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14세기부터 「이탈리아」의 경제는 놀랍도록 비약을 거듭했다. 사업가들은 쉴 사이 없이 기업을 벌여나갔다. 그게 15세기부터는 차차 정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대본은 남아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어지럽던 사회도 안정을 찾았다. 자본가들에게는 축적된 부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술품으로 일상생활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을 애호하기 시작한 것도 물론이었다.
예술의 황금시대는 이렇게 경제적인 뒷받침을 받아서 싹트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듯도 한 얘기다.
한국미술2천년을 돌이켜 보면 사회가 성장기에 있을 때보다는 난숙기에 이를 때 더욱 뛰어난 화가들이 나왔다.
고려의 예술이 뛰어났던 것도 그런 탓이었을 게다. 이조에 들어와서도 특히 세종 이후의 반세기간과 중종 이후1세기 간 그리고 영조 이후1세기간에 능품은 물론이요, 신품이 많이 나온 것도 그렇게 보면 까닭이 있었다.
단순히 정치적으로 안정된 탓에서만이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예술가들이 안정할 수 있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술의 애호가들이 많았던 때문이었다.
이렇게 보면 아직 우리는 예술의 황금시대에 이르기는 멀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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