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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못하면 장애물도 못 넘나 … 101전 101패 '똥말'의 새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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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01전 101패로 한국 경마 사상 최다 연패 기록을 세웠던 퇴역마 ‘차밍걸’이 24일 경기도 화성시 궁평목장 실내승마연습장에서 류은식 선수와 함께 몸을 풀고 있다. [김상선 기자]

101전 101패. 1922년 조선경마구락부가 생긴 이래 한국 경마 사상 최다 연패 기록을 갖고 있는 ‘차밍걸’. 한 번도 1등을 한 적이 없다는 다소 황당한 이유로 유명해진 말이다. ‘위대한 똥말’이라는 닉네임까지 얻었다(중앙일보 5월 25일자 1, 14~15면). 경주마로는 101번의 도전이 모두 실패했지만, 8세 암말 차밍걸은 ‘장애물 비월마’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지난 10월 은퇴한 차밍걸은 서울경마공원을 떠나 경기도 화성시 궁평목장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사실 차밍걸처럼 별 볼일 없는 성적을 남긴 경주마는 은퇴 이후 가치가 급락한다. 씨수말이나 씨암말이 되어 2세를 생산하는 건 소수의 특급 경주마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관광객이나 승마 동호인을 위한 승용마로 여생을 보내는 건 그나마 낫다. 안락사되는 일도 적지 않다.

 류태정(48) 궁평목장 대표는 “차밍걸을 보면 마치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은퇴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한 뒤 마주에게 전화해 맡아 기르고 싶다고 했다”고 말했다. 미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류 대표는 “95년 경주마 목장을 시작했다. 차밍걸을 보면 목장을 시작한 후 너무 힘들어 간신히 버텼던 시절이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그의 목표는 차밍걸을 승용마가 아니라, 엘리트 승마 선수가 타는 장애물 비월용 말로 키우는 것이다. 류 대표는 “수학은 못하지만 음악이나 미술은 잘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차밍걸이 경주마로는 별로였지만 다른 것을 잘할 수 있다. 그걸 찾고 싶다”며 “차밍걸은 경주마로 그 어떤 말보다 성실하게 뛰었다. 차밍걸의 새 도전은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 일”이라고 말했다.

 보통 경주마는 한 달에 한 번 경주에 나선다. 경주를 하면 2주간 쉬고, 2주간 훈련한 뒤 다시 출전한다. 하지만 차밍걸은 1주만 쉬고 1주일 훈련한 뒤 경주에 나섰다. 그렇게 쉬지 않고 뛰어서 밥값을 했다. 이 때문에 특출한 능력은 없지만 성실하게 일해 생계를 이어가는 서민 같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류 대표는 차밍걸의 새 도전을 큰아들 류은식(18)군에게 맡겼다. 류군은 2013년 대한승마협회 올해의 신인상을 받은 승마 선수다. 류군은 하루 한 시간씩 차밍걸을 조련하고 있다. 류군은 직접 솔질을 하고, 목욕을 시켜주고, 발굽에 낀 오물도 파낸다. 훈련 전에는 입술이 틀까 봐 로션까지 발라준다. 경주마 시절에 비해 차밍걸은 체중이 40㎏ 정도 늘었고, 몸에 윤기도 더 흘렀다. 목장주의 아들이 성심껏 길들이는 말에 걸맞게 특급 대우를 받고 있다. 사람과의 교감이 늘어나고, 경주마 시절과 달리 스트레스도 적게 받아 성격도 예전에 비해 부드러워졌다.

 장애물 비월마로 차밍걸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긴 막대 6개를 바닥에 놓고 피해 가는 훈련을 하고 있다. 류군은 “ 내년 봄에 열리는 초급마 대회에 출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류 대표는 “아직까지는 차밍걸의 실력을 가늠하기 어렵다. 만일 전국체전에서 우승하고, 5년 뒤 열리는 아시안게임에라도 출전한다면 정말 드라마 같은 일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글=이해준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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