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나처럼 세월에 잡아먹히고 말 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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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호 28면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아일랜드 태생으로 불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로 번갈아 가며 작품을 썼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프랑스로 건너가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고, 196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나 수상식 참가를 비롯해 일체의 행사를 거부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거대한 몸집의 사투르누스가 입을 크게 벌리고 아이를 잡아먹고 있다. 아이의 머리와 한쪽 팔은 이미 사라지고 없고, 붉은 피가 줄줄 흐른다.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이렇게 몸서리칠 만큼 잔인하고 끔찍하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50>『고도를 기다리며』와 사뮈엘 베케트

오죽했으면 고야 평전을 쓴 홋타 요시에가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이제 우리는 정말로 음산하고 무시무시한 작품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을까. 바로 이 그림의 주인공, 사투르누스는 시간의 신이다.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잡혀 먹히는 아이는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이다. 시간은 가차없이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시무시한 시간이 역설적으로 한없이 지루하고 따분해질 수 있다. 오지 않는 그 무엇을 기다릴 때, 아니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를 때 우리는 얼마나 초조해하고 지겨움을 느끼는가.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딱 이런 처지다.

둘은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 서있는 한적한 시골길에서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닌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것인데, 고도만 오면 기다림이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다. “오늘 밤엔 그자의 집에서 자게 될지도 모르잖아. 배불리 먹고 습기 없는 따뜻한 짚을 깔고 말이야. 그러니까 기다려볼 만하지. 안 그래?”

하지만 고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기다림의 장소가 어딘지조차 불분명하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습관처럼 돼버린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두 사람은 온갖 짓을 다 해본다.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기도 하고, 서로 욕도 하고, 심지어 목을 매달아 볼 생각까지 해본다.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 끝없이 뭔가를 해야만 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몸짓은 답답할 정도로 반복된다. 확실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를 따져보는 거란 말이다. 우린 다행히도 그걸 알고 있거든.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그러나 하루가 다 끝나갈 무렵 이들 앞에 나타난 것은 고도가 아니라 고도의 전갈을 알리러 온 소년이다. 고도는 오늘 밤에는 오지 못하고 내일은 꼭 오겠다는 전갈을 알려온다. 두 사람은 화도 내지 못하고 소년을 돌려보내지만 다음 날도 상황은 똑같이 되풀이된다.

2막짜리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렇게 특별한 줄거리도 없이 좀 황당한 대사와 무의미한 행동으로 시종일관한다. 굳이 극적인 사건을 꼽자면 뜬금없이 등장하는 포조와 럭키라는 더 괴상한 인물이다.

목에 끈을 매단 채 모래가 잔뜩 들어있는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다니는 럭키는 1막에서는 알 수 없는 장광설을 늘어놓더니 2막에서는 벙어리가 되고, 1막에서는 채찍을 흔들며 럭키를 사납게 몰아세우던 포조가 2막에서는 장님으로 등장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난 어제 누구를 만난 기억이 없소. 내일이 되면 또 오늘 누구를 만났다는 게 생각 안 날 거요.”

럭키가 언제부터 벙어리가 됐느냐는 물음에 포조는 버럭 화를 낸다. “그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지 좀 말아요! 말끝마다 언제 언제 하고 물어대다니!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그냥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됐지. 여느 날과 같은 어느 날 저놈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 어느 같은 날 어느 같은 순간에 말이오.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냔 말이오.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

이 작품은 불어로 쓰여져 1953년 1월 5일 파리에서 초연됐는데, 사뮈엘 베케트는 고도가 누구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그것을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는 묘한 대답을 남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고도는 신일 수도 있고, 구원일 수도 있고, 자유 혹은 행복일 수도 있다. 어차피 기다림은 인간의 숙명이고 그게 인생이니까.

일흔넷의 나이에 큰 병을 앓은 뒤 ‘귀머거리의 집’에 은둔한 채 ‘검은 그림’ 연작에 몰두했던 고야는 사투르누스 그림 맞은편에 ‘레오카디아’를 그렸다. 우수에 잠겨 있지만 여전히 생기발랄한 하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서른두 살의 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고야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나처럼 너도 곧 이렇게 세월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한번 지나가버리면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올 한 해도 다 지나갔다.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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