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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처마 밑에선 마음 놓고 울어도 좋으리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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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호 24면

『몽실언니』 『강아지똥』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 교회 문간방에 더부살이하며 종지기로 일했던 일직교회. 손민호 기자
1 5평 될까 말까 한 선생의 집.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당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2 누군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은 창호지 안으로 선생의 영정이 보인다. 예의 그 깐깐했던 모습이다. 3 선생이 새벽 4시마다 종을 쳤다는 일직교회 종탑. 그 아래 선생이 남긴 글귀가 남아 있다.

그곳은 외딴 곳에 처박힌 폐가라고 해야 맞다. 5평이나 될까 싶다. 키 낮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흙을 발라 세운 벽에는 여기저기 가느다란 금이 가 있다. 이 초라한 흙벽이 힘겨워하며 그나마 기울어져 가는 집을 지탱한다.

손민호의 힐링투어 ④ 경북 안동 권정생 생가

마루가 없어 집이 아니라 창고 같다. 마당이라기보다는 잡초 무성한 공터라고 해야 마땅한 자리에 반쯤 쓰러진 개집이 있고, 개집에서 네댓 발짝 뒤로 변소가 떨어져 있다. 변소를 보고서야 이 흉물스러운 건물에도 한때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겨우 짐작한다.

대문도 없어 창호지 붙인 방문이 현관이다. 그 위에 낡은 명패가 붙어있다. 권정생(1937∼2007). 평생을 병마와 싸우고 가난과 더불어 살다 간 한 사람의 이름이다. 마을 교회에서는 종지기 할아버지이자 교회학교 선생님이었고,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억수로 착한 사람’이었고, 한국 문단에서는 밀리언셀러를 생산한 최초의 동화작가였다.

이태 전 늦가을, 나는 이 집에 처음 갔다. 생전에는 연이 닿지 않아서 당신을 뵙지는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당신의 안녕을 기원했고 당신의 부음이 전해진 몇 해 전 어느 봄날에는 남몰래 꾹꾹, 눈물을 삼켰다.

여행 기자로 살면서 안동엔 자주 내려가는 편이다. 도산서원도 하회마을도 있고, 심지어 안동찜닭도 있다. 안동으로 내려가는 길 운전대를 잡고서 나는 매번 다짐하곤 했다. 이번에는 찾아봬야지…. 그러나 혼자만의 다짐은, 늘 허덕이는 일정에 밀리기 일쑤였다. 지금도 안동에 내려갈 때면 종종 당신이 생각나서 죄라도 짓는 기분이 든다.

맨 처음 『몽실 언니』를 읽은 게 언제였나. 아마도 20대 어느 날이었을 게다. 말랑말랑한 동화책인 줄 알고 집었던 책은 시종 나를 불편하게 했다. 주인공 몽실이의 인생이 너무 비참했다. 몽실이는 절뚝발이였고, 거지였다.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았다. 소설은 몽실의 굶주린 이야기로, 빌어먹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때만 해도 작가의 이력에 무지했던 나는, 작가가 위악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고약한 사람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다 나는 어느 신문 칼럼에서 권정생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고, 몽실이의 비극이 바로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알고 말았다.

권정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노동자의 아들이었다. 도쿄 변두리 빈민가 함석지붕 집에서 거리 청소부였던 아버지와 삯바느질하는 어머니 아래 7남매 중 여섯째로 자랐다. 소년 권정생은 쓰레기더미에서 헌책을 찾아 읽었다. 곰팡이가 슬고 반쯤은 찢긴 『이솝 이야기』 『그림동화』 『행복한 왕자』를 읽었다.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며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에서도 배고픈 건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나무·고구마·담배 따위를 팔며 험하게 살았다. 그러다 병을 얻었다. 늑막염·폐결핵·방광결핵·신장결핵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죽는 날까지 그는 방광이 없어 오줌을 호스로 빼내 주머니에 받아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병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기가 찬 동생에게 병든 형이 짐이 된다는 걸 알고는 다시 집을 나왔다.

이리저리 떠밀려 살던 권정생은 1968년 2월 안동의 일직교회 문간방에 정착했다. 교회 문간방 더부살이의 일은 종지기였다. 그는 새벽 4시면 어김없이 교회 종을 쳤다. 아무리 추워도 장갑을 끼지 않았다. 그가 종지기로 일했던 교회 종탑 아래에 선생이 남긴 글귀가 남아있다.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선생은 교회 문간방에서 아픈 몸을 달래며 어린이의 마음을 담은 시와 소설을 썼다. 당신이 문간방 생활을 회고한 글에선, 하도 기구해 차라리 어처구니없었던 그의 인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 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 ‘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우리들의 하느님』 20쪽.

권정생은 2007년 5월17일 오후 2시17분쯤 대구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열아홉 살부터 앓아왔던 병마에서 마침내 풀려난 것이었다. “한 달 생활비가 5만원이면 좀 빠듯하고 10만원이면 너무 많은 삶”을 살았던 그는, 그러나 12억원이 넘는 돈을 남기고 떠났다. 평생 인세로 모은, 아니 모인 돈이었다. 그는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당신의 임종을 지킨 시인 안상학(50·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은 “선생님은 ‘인세를 굶주린 북녘의 어린이에게 우선 쓰고, 남는다면 아시아·아프리카 등 전 세계의 굶주린 어린이를 위해 썼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선생의 유언은 남북관계가 험해지면서 여태 따르지 못하고 있다.

선생이 세상을 뜨고서야 동네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돌보는 이 하나 없는 딱한 늙은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전국에서 찾아온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게다. 당신이 큰 돈을 남길 정도로 부자였다는 사실도 동네에서는 새까맣게 몰랐다.

선생의 집은 82년 교회 종지기를 그만두고 이듬해 지은 집이다. 주인을 잃은 뒤로 내내 비어있지만, 인적은 의외로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방문 앞에 내다 둔 책상 위에 방명록이 놓여있는데, 방명록에 예까지 물어물어 찾아온 이들의 흔적이 수두룩하게 포개져 있다.

맨 처음 선생의 집에 갔을 때, 창호지를 바른 방문에 손가락 굵기보다 조금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선생의 방을 엿보고 싶었던 누군가가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낸 구멍이었다. 그 구멍으로 방을 들여다봤다. 마침 정면으로 선생의 영정이 보였다. 예의 그 깐깐한 표정이었다. 창호지가 더 찢어지지 않을까 조심하며 카메라를 꺼내 구멍 바깥에서 영정을 찍었다. 나는 그 영정 사진을 노트북에 따로 저장해놓고 가끔 열어 본다. 일에 허덕일 때마다 수첩에 끼워둔 가족사진을 꺼내보듯.

크리스마스가 지척이다. 신앙 없는 이에게도 교회나 성당이 궁금한 계절이다. 나는 이 계절이 오면 안동 외곽의 작은 교회가 궁금해지고, 그 교회에서 종을 치다 간 사람이 궁금해진다. 그가 남긴 동화 중에 『강아지똥』이 있다. 강아지똥, 다시 말해 개똥이 주인공이다.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는 개똥이 봄비를 맞고 민들레 싹의 거름이 되어 마침내 민들레 꽃을 피운다는 줄거리다. 어느 날 문득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내 울다 오고 싶으면, 나는 모질디 모진 인생 살다 간 그 사람 집으로 간다. 거기에선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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