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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아낀 선조들] 전등·전차 도입 앞장 선 高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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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우리는 일본에서 전기용품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전깃불이 어떻게 켜지는 줄도 몰랐다. 인간의 힘이 아닌 악마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미국에 와서 비로소 그 사용 방법을 알게 되었다…조선에서도 전기를 사용하고 싶다 '.

미국을 방문했던 유길준의 회고다. 이미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많은 서구의 지식이 봇물처럼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전기는 수입 요구가 강렬한 서기(西器)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87년 3월 경복궁 고종의 침전인 건청궁에서 일대 드라마가 펼쳐진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지 채 10년이 안돼 동양에서 최초로 에디슨 전구가 조선의 궁궐에서 불을 밝힌 것이다.

전구 7백여개가 모두 켜지자 어두웠던 경복궁의 밤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몇 달 전인 1886년 겨울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로부터 수입한 전구 수백개와 설비들이 인천항에 도착했고, 그 후 전기기사 메케이가 입국하자 전구 점화식은 빠르게 진행됐다.

도중에 기술자 메케이의 사망으로 점등식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고종의 노력으로 드디어 3월에 경복궁의 밤은 낮으로 바뀐 것이다.

고종을 위시해 당시 위정자들에게 건청궁의 빛나는 전구들은 어두운 조선의 현실을 밝혀줄 수 있는 새로운 태양으로 여겨졌다.

아니 많은 참관인들조차 앞으로 조선의 미래가 이렇게 밝게 빛날 것이라고 믿게 됐다.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기만 있다면, 그리고 전원을 공급할 수 있는 전선만 가설된다면 조선 어디에서든 불을 밝히고, 전차를 움직이고, 전화를 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고종은 이를 하루라도 지체할 수 없었다.

물론 전기 공급자로서 세상을 밝히고 있는 고종의 이미지 뒤에는 많은 손해를 무릅쓰고 동양에 진출하기 위해 성대한 세리머니를 준비한 에디슨 전기회사의 제국주의적 본질이 감춰져 있었다.

본격적인 고종의 전기 도입 사업은 1898년 한성전기 회사의 설립과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의 운행으로 더욱 그 빛을 발했다.

전차의 힘찬 움직임, 그 자체로도 서울은 더 없는 활기를 되찾는 것처럼 여겨졌다. 몇 건의 교통사고와 불편한 생활풍속은 신문명에 적응하지 못하는 촌스러움으로 치부됐다.

밤을 낮으로 바꾸는 전등, 지칠 줄 모르는 힘으로 서울을 누비는 전차의 경적 소리를 들으면서 어느날 고종은 전화로 외무대신을 찾고 있었다.

의정부:여보세요. 의정부입니다. 외무대신께서 관청에 출석하였는지요.

윤용구(당시 일직):대신께서는 강가의 별장에 계십니다.

의정부:황제폐하께서 부르시니 빨리 알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윤용구:금방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외무대신은 아직 궁궐에 출석하지 않았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의정부:황제께서 부르신다는 말씀을 전하셨나요.

윤용구:이미 빠른 걸음으로 가서 전하도록 했으나 강가까지는 거리가 있어 아직 심부름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의정부:급히 부르시니 다시 한번 사람을 보내어 알리십시오.

외무대신은 오후 6시가 돼서야 소화불량으로 몸이 불편해 궁궐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도입된 서기는 조선의 풍경을 새롭게 바꾸고 있었다.

김호 서울대 규장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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