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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그 이튿날 낮 후에 아주버님(백부)께서 할머님을 모시고 동대문 밖 궁으로 나가셨다. 그 궁은 외조상 광평대군이 계시던 집이라 오촌 족장이 충의를 지키고 계셨다.

<한 때 형이 행방불명>
새 어머니도 우리 동생들을 데리고 함께 나가니 그 때에 맏누님 진사 이문영 부인은 시부모를 모시고 같이 가시고 둘째 누님은 처녀로 나이 열일곱이고 맏형은 열다섯, 중형은 열셋, 나는 열하나요, 동생 셋중에 맨 위가 겨우 아홉살이었다.
하루 묵어 그믐날 양주 풍양으로 다 쓸어가는데 마침 비바람이 쳐서 길이 아득하여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사촌형님과 한 말에 어울러 타고 두 형님은 딴 말을 타고 갔는데 막 풍양(양주의 속현으로 광릉입구의 양주군 진접면 내곡동에 풍양고현이 있었다. 고을 동쪽 궁동에 풍양행궁이 있는데 이는 태조·태종이 주약한 옛 궐터로 비각이 있었다)에 이르러 찾으니 형님이 간데가 없었다.
『급히 사람을 시켜 찾아보라. 아주버님이 서두르시었다. 그런데 길가에 빈 말이 있기에 살펴보니 서울서 나올 때 효손상자에 어머님의 신주를 형님들이 메고 떠났는데 그 상자만이 길마 위에 얹혀있는 것이었다. 아주버님이 보시고 이르시되
『불쌍토다. 본래 슬기로운 아이들이라 제가 비도 맞고 못 오게되니 제 어머님 신주를 찾아가게 해 두고 저는 어디 갔는가 보구나.』

<난민들이 대궐 태워>
사람을 풀어 백방으로 찾게 하였더니 저물게야 가까스로 데리고 왔다.
사날 뒤 어떤 사람이 와서 예(왜)가 벌써 서울에 들었으니 여기도 멀지 아니하여 쳐들어올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는 소나무를 베어 집 위에 덮고 잔디를 떠서 길을 가리면 예가 지나가더라도 인기가 있는 줄 몰라 들어오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그때까지 예가 어떤지 모르는 얘기였다.
그런데 하루는 전에 습독(훈련원의 종 구품 무관직) 벼슬을 지낸 허수라는 사람이 와서 아주버님을 뵈옵고 울며 간곡히 사뢰는 것이었다. 『여러 식구를 한데 모아 두시다가 불행히 도적(왜구)이라도 만나게 되면 어쩌시렵니까. 하나도 남지 못할 것이니 여러 곳에 흩어있게 하셔야 합니다. 소인은 어려서부터 대감 덕분에 무탈하게 지내왔는데 이제 보은하는 뜻으로 대감 자제를 맡겨주신다면 소인이 죽지 아니한 다음에는 잘 보살펴 드리오리다.』
그 말이 간절하여 맏형님과 나를 맡기려하였다. 그러나 아주머님(백모)이 그를 들으시고 아주버님께 『행여 거기 가서 좋이 지낸다면 모르지만 불행히 추한 일을 당하면 어쩌시렵니까』하고 극구 만류하시었다. 아버님이 떠나시며 우리를 의탁하셨으므로 한데 있어 생사를 같이했다면 아무 한이 없지만 만약 보내서 불행한 일이 있을까 걱정되니 굳이 보내려 하시거든 맏형일랑 두고 나만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이었다.
아주버님은 옳게 여기시어 나를 가라고 했다. 그날 허습독은 소를 타고 왔으므로 나를 그 소에 태우고 길을 떠났다. 풍양대궐을 지나가는데, 그 때에 난민들이 대궐의 보배와 곡식들을 먹고 불을 질러 불이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길의 사람들은 서울에 예가 들었다고 수군거렸다. 우리는 소를 부지런히 몰아 큰길을 지나갔다.
양주 숙당이에 매부 이진사(이문영)가 맏누님과 노친을 모시고 계시다함으로 그리로 찾아가기로 했다.

<매부집도 이미 빈집>
그러나 서울에 왜구가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데로 떠난 뒤여서 빈집들뿐이었다.
그래서 아무데도 물을데 없어 한참동안 헤매고 있는데 홀연히 산에서 종 두엇이 내려와 인사를 했다.
『진사님이 오늘 아침에 숙당으로 떠나가시면서 나를 여기 머물러 있게 하고 만일 풍양 땅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거든 데려 오라 하셨나이다.』
그의 말대로 그 종을 앞세우고 한 재(영)넘어 10리쯤 가니까 산골짜기에 두어 집 있었다. 하지만 여기도 큰길에서 그리 먼 것은 아니었다. 진사 형님과 누님이 나를 보고 여간 기뻐하지 않을뿐더러 나를 다시 허습독에게 맡겨주려 하지 아니하였다. 허습독은 매우 서운히 여겨 한마디 남기고 헤어졌다.
『제가 있는 곳이 여기서 멀지 아니하므로 자주 와보렵니다만 만일 도둑이 더 가까와져 멀리 가게되거든 부디 가도록 하사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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