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00)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8)신흥청년동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상해에서 4년 만에 다시 국내에 들어선 박헌영은 임원근 김태연과 함께 그 무렵 갓 결성된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했다. 그의 신흥청년동맹에의 가입은 국내에 들어 선지 처음으로 갖는 활동이다.
박은 1924년1월19일 평양형무소에서 l년6월의 복역을 마치고 만기 출옥하여 곧장 서울로 들어왔던 것이다.
평양에는 그의 아내 주세죽이 허정숙과 함께 출옥하는 이들을 마중하러 나와 있었다.
허정숙은 그의 애인인 임원근을 맞이하러 갔었다. 두 여인은 박헌영 등보다 반년쯤 늦게 상해를 떠나 국내에 들어왔다.
박헌영 부부는 서울에 온 뒤 지금 종로 앞 훈정동에 방 한 칸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주세죽과 함께 고향인 충남예산에 인사차 내려갔다.
예산군신양면에서 술집을 차려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신식여성을 데리고 온 그의 아들을 깜짝 놀라며 맞아들였다.
박의 학교 때 친구였던 윤돈구씨(74·충남례예산군예산읍162의2·생존)에 의하면 그 때 예산에 내러온 박헌영 내외는 온 동네 사람들에 둘러싸여 인사말을 받느라 진땀을 뺐다한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맞아 떡을 빚고 간단한 혼인예식까지 차렸다 한다. 박헌영이 주세죽과의 결혼식을 어디서 했는지는 확인 할 수 없으나 윤씨 말로는 박이 내려왔을 때 혼인예식에 가까운 예식을 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씨는 지금도 박이 주세죽과 예산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기억했다. 부부는 예산서는 며칠 머무르지 않고 곧 서울로 올라갔다.
박헌영이 서울에서의 첫 활동으로 가입한 신흥청년회는 24년2월11일 김찬 박일병 민태흥등 23명에 의해 결성되었다. 당초 신흥청년회는 반 서울청년회계의 토요회「멤버」들이 주동이 되어 순수한 무산자청년단체를 만든다고 조직한 것이다. 그래서 회의 명칭도 처음엔 무산이란 두 자를 머리에 사용하려 했으나 무산이란 말을 쓰면 일경이 사사건건 간섭하고 전단 한 장 뿌릴 수 없을 것 같아 신흥이란 용어를 대신 쓴 것이다.
회의 목적은 무산계급청년의 교양과 단결을 기하는데 두었고 회원의 자격은 18세 이상30세까지의 무산청년으로 제한했다.
워낙 활동에 제한을 받는 때인지라 청년 외의 사업계획이란 것도 겉으로는『출판·강연·강습·연극 등을 때때로 개최하며 청년수양에 관한 일반조사를 실시한다』고만 하였다.
그러나 신전청년동명은 내부적으로는 지금까지 우후죽순 격으로 무수히 탄생한 어느 청년단체와는 그 질이 달랐다. 국내에서도 홍명희 홍대식 윤덕병 취연흠 원우관 이재성 조봉암등 신사상연구회 (뒤에 화요회가 됨)「그룹」과 그밖에 배성회「그룹」을 모두 망라했고 국제적으로도 사실상「코민테른」의 직접지도를 받은 단체이었다. 그와 같은 실례로 신흥청년회에는 「코민테른」측에서 밀파한 김재봉 신철 등이 이미 조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들 중 김재봉온 23년4월에「코민테른」「코르뷰로」(고려 국) 의 당 조직책으로, 신철은 공산청년동맹조직책 사명을 띠고 배후에서 조직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사실상 상당한 정치자금도 가지고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신흥청년동맹은 처음부터 조직목적이 국내 공산주의조직의 전위단계로 표면에 내세워진 청년단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박헌영 등이 출옥하자마자 입회활동을 한 것도 속셈을 미리 두고 끼어 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겉으로는 차분한 듯 하면서도 곰처럼 끈질긴 박의 강인성은 차차 활동 상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흥청년동맹이 결성되고 난 뒤 12일 뒤인 23일 박헌영은 홍명본 김찬둥과 함께 종로중앙회관에서 첫 대강연회를 가지려했으나 악명 높기로 이름났던 종로서가 돌연 불온하다는 이유로 강연회를 금지했다.
이 때문에 첫 대강연희 계획은 깨져 다시 3월11일부터 한 달 동안에 걸쳐 전국순회강연을 열었다. 순회강연「팀」은 남조선반과 서 조선반의 두「팀」으로 나뉘어져 박헌영은 김찬 신철과 함께 무주 공주 대구 광주 등28개 도시를 순회하며『청년의 사회적 지위』『이제로부터의 청년』『청년의 사적고찰』등 꽤다양한 제목의 강연회를 가졌다.
박헌영의 웅변은 굵직하고 선동적인 편은 못 되었으나 설명적이면서 진지한 편이었다. 목소리는 카랑카랑했으며 키가 작은 그가 열변을 토할 때는 야무진 모습을 보였다.
한편으로 신흥천년동지는 일종의 기관지로 『신흥청년』을 만들기 위해 신흥청년 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신흥청년 사는 8월11일쯤 회원 20여명이 지금관수동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출판에 관한 협회를 했다. 자금은 주식을 5백 주 가량 만들어 1만5천 단을 모금키로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신흥청년 사는 재무·편집·서무 부를 두었는데 상무위원으로는 박헌영을 비롯 심태연 임원근 김찬홍 낙식 민태전 임견호 등이 맡았다.
신흥청년은 그 해 9월 창간호를 냈으나 자금사정으로 그 이상 속간하지 못하고 중단하고 말았다. 국내에 들어 선지 몇 달만에 박헌영은 이미 그의 조직의 촉수를 청년단체·출판사에 뿌리 뻗친 것이다.<계속>
◇알림=전회⑭회 「모스크바」극동인민대표회의관계의 이야기 중 이 회의에 민족 계 대표로 참석했던 나용균씨(전 국회부의장)는 한국대표들이 낸 성명에 자신의 이름이 기입된 것은 최창식이 제멋대로 나씨의 서명을 써넣은 것이라고 밝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