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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9)제 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7)배성회(배풍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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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사국이 주도한 서울청년회이외에 국내에는 일본유학생들로 구성된 배성회(배풍회)가 또 하나의 유력한 청년단체로 등장했다.
북풍회는 전회에서 잠깐 얘기한 것처럼 일본 유학생출신인 김야수(김두전 이라고도 했음)가 김종범 정운해 서정희 이 여성등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금고수라면 1949년6월의 남로당 국회 「프락치」사건의 주모자로 관련된 제헌의원으로 더 널리 알려져 온 바로 그 사람이다.
유학생중심이었기 때문에 성격은 다소 친일적이었으며 국제주의인 것이 특색이었다.
의욕에 찬 북성회 측은 국내에 세력을 확보하여 청년단체를 포섭하는 한편 국내유일의 청년단체로 국제공산당의 승인까지 받으러 기도했다.
북성회의 지도자급인 김야수는 이 작업을 정우영을 시켜 당시 「코민테른」요원이며 일본의 원로사회주의자인 편산참을 통해 달성해 보러했다. 정우영은 편산의 제자로 신임이 퍽 두터운 사이였다.
이런 연유로 김야수는 22년7월 정을 상해경유 「모스크바」로 보내어 편산을 만나도록 했다.
편산은 이때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앞으로 고려공산당은 결국 국내에서 조직해야되며 그렇게되면 제군들의 힘이 필요할 것』이라고 격려했다한다.
정우영은 돌아와서 이 사실을 김야수에게 보고했다. 이에 자극된 김야수는 부랴부랴 국내 청년단체의 규합을 기도하게됐다.
그러나 북성회보다 l년여 앞서 조직된 서울청년회의 국내기반은 여간 단단하지 않았다. 국내 토착인사들의 모임이 주 세력을 이루었던 만큼 재정도 튼튼했다.
서울청년회 측은 북성회 측의 이 같은 기도를 눈치채고 서로 시기와 반목의 싹이 텄다.
그 무렵 김야수는 국내에서 전위적 거치를 휘둘러보기 위해 23년8월1일부터 일주일 동안에 걸쳐 일본 사회주의자 표시장치·북원룡운 등을 초대, 서울을 비롯해서 평양·광주·대구·진주·마산·김해 등지에서 순회강연을 열며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던 참에 뜻하지 않은 사고가 하나 생겨났다. 김의, 특사노릇을 한 정우영이 고향인 부산에 잠시 다니러 왔다가 바다에서 익사했다. 이 비보를 지방순회강연 중에 들은 김야수는 부산에서 가까스로 정의 익사체를 발견해내고 경남도의 7,8개 청년단체와 합의를 본 결과 서울로 시체를 운구하여 청년단체장을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정의 시체를 기차 편으로 서울로 옮기고 당시 종로구견지동에 있던 서울청년회사무소에 안치하려고 하자 뜻밖에도 서울청년회가 어를 거절해버렸다.
북성회 측은 할 수 없이 다시 윤덕병 강달영 등이 만든 조선노동연맹회로 시체를 운반한 다음단체장 거행을 촉구했으나 김과 가장 절친한 사이인 이영(서울청년회소속·해방 후 월북·53년 최고인민회의 의장·조국전선의장단 역임)으로부터도 동의를 못 얻었다.
서울청년회와 북성회 측과의 반복은 끝내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져갔다. 그해여름 순회강연을 모두 마치고 김야수 일행은 8월24일 당로관철동에 있었던 낙양관이란 요리점에서 당시조선노동공제회 집행위원장인 박이규 등과 함께 한잔 벅고 있던 때였다.
이를 탐지한 서울청년회 계는 『북성회 측이 드디어 「코민데른」자금을 사취한 사기공산당 관련자(박이규는 장덕수와 함께 사기 공산당사건에 몰렸음)와 악수를 했다』,『북성회의 주의사귀은 가짜다』라고 부르짖으며 우르르 연회장을 침입했다.
그리고는 그 무렵 신사들이 유행처럼 돌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던 단장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북성회 인사들을 다짜고짜 두들겨 팼다. 이 소란으로 김야수 박이규 등 5명이 얼굴이 터지고 코피가 나는 피해를 보았다.
사태가 이쯤 되자 이번엔 북성회 측 인사들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낙양관사건이 난 이틀 뒤인 25일 두 파의 이간질은 최창표(전 북한내각 재정상·허정숙 남편)이 주로 꾸민 것이라고 판단하고 최를 김야수가 묵고있는 인사동 장안여관에 유인하여 납죽 때려주었다. 최창세은 이 때문에 2주정도의 타박상을 입었다한다. 이때부터 북성회계봉 서울청년회는 극도로 악화되어 견원지간의 사이가 돼버렸다.
순수하게 천년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그 모양이었으니 그 무렵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파벌싸움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보여준다. 파벌 싸움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다.
이래저래 북성회 측은 국내에 아류단체를 서울청년회처럼 폭넓게 확보하지 못한 것을 못내 통감한 나머지 그 해 10월23일에 서울재동에서 김야수 김종범 김재명 등 1백60여명의 사회주의청년들이 모여 새로 건설사를 조직했다.
건설사는 나중에 북성회의 국내본부로 발전적 해체되어 북풍회로 이름이 바꿔지게 된다 (북풍회조직은 24년11월25일).
여기서 1920년대 국내청년활동의 2대 지류를 형성했던 두 단체를 좀더 알기 쉽게 풀이해보면 서울청년회계는 조선노동대회,조선노동공제회,민중모,신생활사 등을 포옹하고 있었으며 이의 중요인물은 김사국 이영 정백 최창탄 이정우 김영만 김병희 허일 이병의 이춘균 차합년 한신돈 최상덕 박형병 이성태 장채극 장일환 등이었다.
그리고 대립관계에 있던 북성회계는 무산자동맹, 조선노동련맹회, 토요회, 신사상연구회 (후에 까요회)를 이끌었고 여기 주요인물은 신백우 윤덕병 이준태 김야수 민태흥 이호 최완 손영극 송봉우 김장현 장병천 박일병 전찬 조봉암 정재달 신철 등이었다.
해외에서 공산주의자간에 상해 파다,「이르쿠츠크」파다하고 파벌싸움만 벌이는 것을 실감나게 목격한 박헌영 등이 국내에 돌아와서도 서울청년회다, 북풍회다 하고 싸움질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으리란 짐작이 쉽게 간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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