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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이철호의 시시각각

북조선, 안녕들 하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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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철호
논설위원

“남쪽이라면 무죄지, 처형 대상이 아니다.”

 판사를 하는 친구가 북한의 장성택 판결문을 본 뒤 털어놓은 소감이다. 장의 자백 중에 “정변 시기는 딱히 정한 것이 없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판사 친구는 “이석기 사건의 변호인단도 ‘내란의 수단·방법·시기에 대한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며 무죄라 주장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장성택이 자신의 비밀돈창고에서 460만 유로를 꺼내 탕진한 것은 사유재산에 해당되며, 외국도박장 출입건은 시기·장소·금액이 특정돼 있지 않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 판결문은 6400자가 넘는다. ‘판결은 즉시에 집행되었다’로 끝맺기까지 만고역적·매국노와 같은 온갖 정치적 수사가 흘러넘친다. 판사 친구는 그나마 증거가 뒷받침되는 혐의로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와 ‘원수님의 친필서한을 새긴 천연화강석을 지휘부 청사 앞이 아니라 그늘진 곳에 세웠다’를 짚었다. 그는 “남한에선 공무 불찰에 대한 징계라면 몰라도 기소 자체가 불가능한 사안”이라며 손사래쳤다. 그는 “진실에 다가서려면 법전을 뒤적이기보다 차라리 다른 쪽을 찾아보라”고 권유했다.

 장성택 처형을 놓고 온갖 해석이 난무한다. 군부와의 권력투쟁에서 김정남 접촉설, 심지어 이설주와의 추문 루머까지 쏟아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단순·무식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나온 영화 중에 『강철대오-구국의 철가방』이 있다. 여기에서 코믹배우 고창석은 “독재(獨裁)는 홀로 독! 꼴릴 재!”라는 독창적 해석을 내린 뒤 멋진 대사를 날린다. “모두가 다 꼴리는 대로 하면 그게 민주주의고, 지 혼자 꼴리는 대로 하면 그게 독재인겨~.” 그래 맞다. 적어도 분명한 사실은 김정은 제1비서에게 장성택은 마음에 안 들었다는 것이다.

 장성택 숙청의 전개 과정은 소름 끼치게 끔찍하다. 공개 체포-단심 재판-즉각 처형의 충격적 장면들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반대 세력의 말살을 통해 가공할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대중의 무조건적 복종을 끌어내려는 공포정치의 전형이다. 그 무엇보다 미 국무부의 분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김정은 정권의 힘을 보여준 게 아니라 극단적 잔인함을 보여준 것이다.” 한겨레신문도 “북한 권력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민낯으로 드러냈다”고 진단했다.

 공포정치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충성경쟁이 불을 뿜고 있다. 생존을 위해 자동으로 반사하는 무조건적 반응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선군정치’ 같은 추상적 구호는 사라졌다. 오로지 ‘백두 혈통’의 부계(父系) 혈연만 따지는 부족국가로 회귀한 느낌이다. 북한은 “오직 원수님밖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고 했다. 알고 싶어 하다간 다친다는 두려움이 묻어난다. 독재정권은 말기로 갈수록 무자비하고 잔인해진다. 공포정치는 양면의 칼이다. 누구나 희생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지도부의 동요와 극심한 민심이반을 낳기 때문이다.

 지금 눈여겨볼 쪽은 중국이다. ‘북한의 내부 문제’라면서도 중국 공산당 정치국의 내부 분위기는 딴판인 모양이다. “우리에 대한 도전”이라며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한다. 지도부의 흐름에 정통한 환구시보(環球時報)도 “중국 인민들 다수가 북한의 최근 변화에 반감을 느낀다”며 “부정적 시각과 나빠진 여론은 중국 지도부가 북한과의 관계를 처리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뒤늦게 대북비난으로 돌아선 것도 중국의 이런 물밑 흐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북한이 생각보다 오래갈지, 아니면 갑자기 무너질지 아무도 모른다. 중국이 느닷없이 대북 원유 파이프를 잠글 수도 있는 살얼음판이다. 북한의 운명을 재촉하는 초침이 빠르게 도는 느낌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북한 주민들의 생존 환경이 한층 악화됐다는 점이다. 2인자마저 박수를 건성건성 치다 목숨을 잃었다. 요즘 남한 대학가에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유행이다. 철도 파업보다 더 궁금하고 안타까운 게 휴전선 넘어 북조선 사정이다. 그래서 간절히 묻는다. “북조선 주민 여러분, 하 수상한 시절에 안녕들 하십니까!”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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