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견 고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일본 역사에는 수수께끼가 많다. 특히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이른바 「천손강림설」이 무너진 다음부터 일본인의 원류에 대한 문제들은 한층 의문부 투성이가 됐다. 우선 「야요이」 (오생=미생)식 문화론이 있다. 곧 「아이누」인과 같은 선주민의 승문식 문화와는 완연히 다른 미생식 토기를 가진 미생인이 고유의 일본인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승문식 토기와 미생식 토기 사이에는 뚜렷한 연속성이 있음이 드러났다. 그래서 승문 시대로부터의 『원일본인』이 미생 시대에는 혼혈에 의해 체질이 바꾸어 졌다는 혼혈설이 유력해졌다.
그런가 하면 혼혈이 아니라 생활 환경의 변화가 골격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견해도 튀어나왔다. 한편, 미생 시대에 근기 지방 등엔 대륙, 특히 한국으로부터의 도래자들에 의한 혼혈의 요소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또 하나는 이른바 『기마 민족설』이다. 일본의 전기 고분에서 나오는 부장품들은 보기적, 상징적, 주술적인 것이 많다. 여기에 비겨 후기 고분에서는 실용적인 무기며 마구 등 대륙적인 요소들이 눈에 많이 띈다.
이런 변화를 종래에는 이른바 「황실사관」에 묶여 대륙 문화의 전파론으로 풀이해 왔다. 그런데 여기 이 같은 설을 뒤집어엎는 기마 민족에 의한 일본 정복설을 내세우는 학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당시 대화 조정은 한국에 군사적으로 진출할 만큼 틀 잡히지 못했으며, 또 문화적으로 보수적이던 농경 민족으로서 어떻게 주체적으로 북방계 기마 민족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자연 기마 민족이 왜를 정복한 결과로 급격하게 변모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추론이 나온다.
이 밖에도 전후에 가장 흥미 있는 논쟁거리가 된 것은 야마태국의 위치가 어디였겠느냐는 문제였다.
크게는 기내 대화설과 구주설의 둘로 대립되어 있다. 그러나 두 견해가 다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왜인」에 대한 설명에 근거를 두고 있다.
동이전에 처음으로 나오는 「야마태」란 물론 「야마또」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의 역사상의 지명 가운데 「야마또」는 7개 지나 된다. 혼선은 이런데에서도 나왔다. 만약에 야마태국이 근기 지방에 있었다면 그것과 대화 (야마또) 조정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느냐는 것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일본 관동 지방의 천기시에서 7세기께에 고구려인이 축조한 것으로 여겨지는 마견 고분과 조야 고분이 발굴되어 기마 민족설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특히 마견 고분이 발굴되기는 2년 전, 그게 이제야 공개된 것은 혹은 일본 학계의 의식적인 「사보타지」가 아니었었나 하는 의혹도 갖게 된다. 3, 4세기께에 고구려인이 이곳에 이민 국가를 세웠다는 추론을 뒤집어엎을 수 있을 만한 반증이 따로 없겠으니 사실을 덮어두고 싶은 심정도 생길 만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모든게 추리의 세계에 속한다. 좀더 냉정한 역사적 고증이 바람직한 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