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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침묵을 담는 작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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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호 11면

‘황해, 제주’(1992), Gelatin silverprint, 111.9×149.2cm
‘에게 해, 필리온’(1990), Gelatin silverprint, 111.9×149.2cm

2004년 어느 날 독일의 유명한 현대 사진가 토마스 루프가 신촌에 있던 내 작업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당시 작업하고 있던 바다 시리즈가 있었다. 그는 내 바다 사진을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스기모토 히로시를 아느냐고.

사진가 배병우가 본 스기모토 히로시

내가 스기모토의 바다 사진을 처음 접한 것은 1992년이었다. 이이자와 코타로가 일본에서 펴내던 데자-뷰(Deja-vu)라는 사진 무크지에 ‘풍경과 침묵’이라는 제목으로 총 12장이 실려 있었다. 나는 그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에게 바다는 사진가로서 가장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평생을 바다와 가깝게 살아온 까닭이었다.

하지만 내 눈 앞에 있던 그의 사진은 설명이 필요 없는 바다 사진의 정수였다. 95년과 96년에 전시 때문에 일본에 간 적이 있는데, 마침 그의 전시가 긴자의 고야나기 갤러리와 캐나다 대사관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실제로 본 그의 사진은 충격적이면서도 차갑고, 간결하면서도 매우 깊었다. 매우 강한 인상이었다.

그의 작품이 가진 깊은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자연스럽게 현대 사진의 또 다른 두 거장이 떠올랐다. 한 명은 뒤셀도르프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58)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본의 아라키 노부요시(荒木経惟·73)다.

810 규격 카메라의 궁극적인 정교함과 깊이를 가장 잘 구현한 현대 사진가가 두 명 있다. 하나가 스기모토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다. 스기모토는 주로 긴 시간의 셔터 스피드로 사물을 오랫동안 포착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바다 시리즈와 극장 시리즈는 물론 다른 여러 작품에서 그는 그렇게 침묵을 사진에 담는다. 또 이제는 거대한 작업도 마다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전지 사이즈(50 60cm)를 넘지 않는, 원판으로부터 얼마 확대되지 않은 크기를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사진을 제작하는 다양한 방식이 개발되었지만 그는 은염 방식으로 사진을 제작하던 옛 전통에 뿌리를 대고 있는 몇 안 되는 흑백 사진의 장인이다.

반면 구르스키는 같은 규격의 카메라를 쓰면서도 처음부터 대형 화면으로 전시했다. 프라다 매장이나 증권거래소, F1 경기처럼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부터 감옥이나 북한의 아리랑 공연까지 아우르는 그의 풍경 사진은 대형 카메라를 쓰면서도 짧은 셔터 스피드를 통해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스기모토는 느린 시간을 담아내는 흑백 사진의 장인으로, 구르스키는 현대의 풍경을 순간 포착하는 컬러 사진의 장인으로 기술과 예술을 서로 만나게 해 현대 사진을 정점에 도달하게 한 것이다.

일본 사진계에서 두 사람의 거장이 있다면 아라키 노부요시와 스기모토일 것이다. 극단적인 내용으로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논란을 부추기며 작업해 왔지만, 아라키는 분명 일본 전통에 입각한, 즉 우키요에의 춘화 전통을 이어주는 작가다. 스기모토 역시 다분히 일본의 전통을 의식하고 있다. 모리미술관에서의 개인전에서 재현한 일본 전통 ‘노’의 무대나 그 후의 여러 조각과 건축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십수 년 전 미토 아트타워에서 수석 큐레이터로 있던 시미즈 토시오를 만난 적이 있다. 난 그에게 스기모토와 아라키의 2인전을 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스기모토의 사진은 침묵의 선(zen)이고 아라키는 육체의 선(zen)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두 장의 바다 사진은 그저 풍광이고 또 한두 장의 누드 사진은 그저 포르노지만, 각각의 주제에 일생 동안 천착해 온 두 사람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의 경지에 올라 있다. 허무의 풍경과 허무의 육체를 담아내는 높은 경지는 어떤 미술가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90년대 중반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매섭고 깐깐한 인상의 중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어언 20여 년이 지나고 이번 전시 오픈에 맞춰 그의 근황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접해보면, 그 차갑고 단단하던 인상 속에서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셔터를 누르기 전부터 프레임에 담길 상황은 물론 그것이 만들어 낼 개념적 의미까지 주도면밀하게 구성하던 냉혈한 현대 사진가 역시 점점 세월의 무게를 어깨에 얹고 변해 가는 것이리라.

그러나 한편 세월의 변화도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과 새로움에 대한 실험정신을 꺾지는 못하는 것 같다. 특히 이번 전시에 포함된 최근의 번개 시리즈는 내게 바다나 극장 시리즈만큼 그의 카메라를 떠난, 즉 렌즈를 통해 현실을 재현한다는 사진의 전통적 개념을 떠난 다른 차원으로의 변화가 엿보이는 최고의 작품이다.

나의 국제 무대 경력은 90년대 중반 일본을 통해 소나무 시리즈를 전시하면서 시작됐다. 스기모토는 나보다 먼저 알려진 사진가였지만, 국제적 명성을 탄탄히 하게 된 것은 역시 그 무렵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후로 승승장구해 이제 일본은 물론 세계를 대표하는 현대 미술의 거장이 되었다.

물론 일본 현대 미술에서는 구사마 야요이, 무라카미 다카시, 요시토모 나라, 시라가 가즈오 등 이제껏 많은 스타가 탄생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스기모토 히로시의 입지는 내겐 가장 빛난다. 아마 내가 사진가라서 그를 좀 더 가깝게 느끼고 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한국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게 되었으니 축하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명의 사진가로서 나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아낌없는 찬사와 축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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