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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통통하고 영양 많은~ 굴 천지라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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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시드는 계절, 유난히 그리운 곳이 있다. 경남 통영이다. 겨울 통영에 가면 언제나 푸근하다. 시퍼런 남해 바다는 바라보는 이의 가슴을 쪽빛으로 채색하고, 항구 앞 어시장은 갓 잡아올린 활어 모양 활기로 펄떡인다.

겨울 통영은 먹거리도 풍성하다. 굴이 올라오는 까닭이다. 통통하게 살 오른 굴을 거두는 겨울 통영의 앞바다 풍경은 가을걷이가 한창인 어느 농촌의 논밭을 닮아 있다. 통영의 맛은 한도 끝도 없다. 충무김밥·꿀빵·우짜(우동에 짜장 양념을 얹은 음식), 그리고 통영만의 술상 문화인 ‘다찌’까지. 통영에 며칠이고 머물러도, 통영의 맛은 정복 불가하다.

통영의 넉넉함은 입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박경리·유치환·김춘수·윤이상·전혁림 등 내로라하는 거장이 통영에서 나고 자랐으며 통영에서 작품을 생산했다. 요즘에는 동피랑이 있다. 기울어져 가는 달동네를 지역의 문화예술인이 일으킨 감성마을이다. 하여 통영 여행은 감성을 충전하고 시들었던 몸을 세우는 나를 위한 완벽한 보상이 된다.

사시사철 매력이 넘치지만, 통영은 겨울이 제일 좋다. 다시 말하지만 굴 때문이다. 최근 일본 방사능 여파로 우리 수산물도 덩달아 판매가 주춤하지만 굴만은 예외다. 만천하가 굴은 우리네 앞바다에서 바로 건져 올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겨울 통영은 굴로 인해 풍성하고 부산하다. 굴을 채취하는 바다는 새벽부터 시끄럽고, 굴 껍데기를 벗기는 작업장은 해종일 바쁘고, 시장 골목마다 굴 사러 나온 사람으로 가득하다.

통영에서 굴의 지위는 각별하다. 껍데기를 벗기는 작업을 탈각(脫殼)이라 하지 않고 ‘박신(剝身)’이라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케이블카 타고 미륵산에 올라보면 통영 앞바다가 온통 ‘굴밭’이란 걸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통영 앞바다의 굴 양식장 면적은 5371㏊에 달한다. 축구장 8000개 크기다.

마침 통영에 통영을 닮은 길이 났다. 한려해상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지난 10월 통영 앞바다에 떠 있는 6개 섬을 뒤져 섬 주민이 걷던 옛길을 중심으로 ‘바다 백리길’을 완성했다. 통영에는 통영의 명소를 아우르는 ‘토영이야길’도 있지만, ‘바다 백리길’은 늘 바다를 곁에 끼고 있어 더 통영다웠다.

올겨울 추위도 만만치 않다. 긴긴 계절을 어기차게 보내고 싶으면 한 번쯤 겨울 통영을 마주하고 와야 한다. 청정바다의 온갖 좋은 걸 작은 몸뚱어리에 꾹꾹 쟁인 굴만 먹고 와도, 마음이 끌리는 섬 하나 골라 원없이 걷다 와도 좋다. week&이 추천하는 겨울 통영 여행법이다.

푸근한 남녘에서 쪽빛 바다 품는 맛
겨울이 더 좋은 통영 여행

굴 그리고 길. 겨울 통영을 여행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통영 굴을 취재하려고 동틀 무렵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통영 아지매들이 모여 온종일 굴 껍데기를 까는 박신장에서 그네들과 수다를 떨었고, 굴이 팔려가는 경매장도 쫓아가봤다. 이번에 걸은 통영의 길은 ‘바다백리길’이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지난 10월 길을 낸 6개 섬(미륵도·한산도·연대도·비진도·매물도·소매물도) 중에서 충무공의 혼이 서린 한산도를 골라서 걸었다.

통영 굴을 ‘양식’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

굴이 제철을 맞았다. 통영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인 서호시장과 중앙시장 주변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하얀 부표가 오(伍)와 열(列)을 맞춰 줄지어 있는 통영 앞바다는 굴 수확하는 손길로 분주하다. 그렇다. 통영에서는 굴을 수확(收穫)한다. 수하식(垂下式)으로 바다 아래에 굴을 드리웠으니, 다시 거둬들이는 거다.

굴을 둘러싼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흔히 돌에 붙여 키우는 서해안 투석식 굴은 자연산이고, 통영 수하식 굴은 인공산이라고 구분한다. 그러나 수하식이라고 해서 인공으로 부화하거나 사료를 먹이지는 않는다. 통영에서 통영 굴을 ‘양식’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다. 서해산과 달리, 물속에 내내 잠겨 있는 수하식 굴이 플랑크톤을 충분히 섭취해 큼직하고 영양도 많다고 통영 쪽은 주장한다.

이른 아침 굴을 채취하는 뗏목 작업장으로 나갔다. 부표에 뒤룽뒤룽 달린 굴 뭉치를 기중기로 끌어올려 망에 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통영 앞바다로 불리는 한려해상에는 이와 같은 굴 작업장이 약 250개 있다. 한 해 총생산량은 4만t이다. 껍데기를 벗긴 알굴만 잰 무게다.

“올해는 굴 작황이 좋심더. 날씨랑 조류가 좋았던지라 맛도 좋지라예.” 25년째 굴을 채취해온 박욱주(54)씨는 뚝뚝 떨어지는 구슬땀 사이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작업장에서 채취한 굴은 뭍에 자리한 박신(剝身)장으로 옮긴다. 문을 여니 후끈한 열기가 밀려왔다. 통영 아지매 40여 명이 굴의 몸을 벗겨내며 뿜어내는 열기다. 선사시대 패총처럼 작업장에 가득 쌓인 굴을 하나씩 까는 이 작업은 기계로는 불가능하다. 칼로 굴을 벌리고, 알을 조심스레 떼서 바가지에 담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3~5초다. 지금처럼 추울 때는 옆에 떠놓은 따스운 물에 잠깐씩 손을 담그는 시간이 포함된다. 오전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온종일 굴을 까면 보통 알굴 60㎏을 담는다. 알굴 하나의 무게가 10g 내외다.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 점심시간도 아까운 건 알굴 무게만큼 품삯이 정해지는 까닭이다. 1㎏에 2500~3000원을 쳐준다. 통영·거제·고성 일대에 박신장만 300곳을 헤아린다.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만 1만 명이 넘는다.

굴도 알고 먹으면 더 맛있다. 11월부터 12월 초까지 굴 값이 가장 비싼데 김장철 수요가 많은 탓이지 맛과는 무관하다는 게 통영수협 측의 설명이다. 부산에서 김장을 하면 굴 값이 1㎏에 1000원이 뛴다는 얘기도 있다. 5~8월에 수확한 굴에 독성이 있다는 건 낭설이다. 산란기인 탓에 단맛이 떨어지고, 기온이 높아지니 부패하기 쉬울 뿐이다.

●여행정보=서울시청에서 통영까지 자동차로 4시간30분 걸린다. 통영 굴 요리 전문점으로는 향토집이 유명하다. 굴밥·굴전·굴회 등이 나오는 기본 코스요리 1만1000원. 055-645-4808. 겨울에는 굴 외에도 물메기·졸복·대구 등이 맛이 좋다. 서호시장 옆 분소식당은 복국으로 유명하다. 1만원. 055-644-0495. 통영에 가면 저녁에 통영식 선술집인 ‘다찌집’에서 한잔해야 한다. 5∼6년 전만 해도 술을 시키는 만큼 안주를 내줬는데 요새는 정식처럼 1인 가격이 정해져 있다. 항남동 벅수실비는 통영 문화예술인의 아지트와 같은 곳이다. 3만원(1인). 055-641-4684.

섬의 품 파고드는 길 … 딴 세상과의 만남

케이블카 타고 미륵산(461m) 정상에서 내려보는 남해 바다 풍광도 절경이지만 섬의 품속으로 파고들면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린다. 작은 점에 불과했던 섬은 아련한 이야기로, 숲 향기와 파도 소리 머금은 생명으로 다가온다.

한려해상국립공원 관리공단은 3년여 작업 끝에 지난 10월 바다 백리길을 완성했다. 미륵도 달아길(14.7㎞)·한산도 역사길(12㎞)·비진도 산호길(4.8㎞)·연대도 지겟길(2.3㎞)·매물도 해품길(5.2㎞)·소매물도 등대길(3.1㎞) 등 섬마다 길이 하나씩 있다. 통영과 육로로 연결된 미륵도를 제외하고, 가장 쉬이 닿을 수 있는 한산도로 향했다.

‘한산도 역사길’에는 벗어나 있지만, 충무공의 유적 제승당(制勝堂)이 지척이어서 놓칠 수 없었다. 1592년 한산대첩에서 학익진 전법으로 왜군을 무찌르고 기념해 지은 게 제승당이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 사령부로 쓰였으며, 1930년대 현재 건물로 중수했다. 제승당에 가면 한산도가 충무공과 이음동의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장군은 한산도에 머무르며 섬의 지형과 물길과 물때를 속속 파악했다. 섬이 장군이었고, 장군이 섬이었기에 적을 제압할 수 있었고, 적은 섬에 범접할 수 없었다.

한산도 방문객은 연 40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대다수가 제승당만 둘러보고 돌아선다. 한산도 역사길이 제승당을 들르지 않는 까닭이다. 섬 북쪽의 선착장에서 시작하는 한산도 역사길은 섬 한가운데를 질러 남쪽 바다의 진두·야소마을까지 12㎞가 이어진다.

길은 초입부터 아름다웠다. 하얀 벽면에 전혁림 화백의 작품을 그려 넣은 벽화가 여행자를 맞았다. 곧이어 한산대첩의 격전지를 볼 수 있는 학익진 전망대가 나타났다. 여기서부터 망산(293m)까지 약 10㎞는 수목이 우거진 숲길이다. 동백터널에 이어 솔 향기 가득한 곰솔 군락지가 나타났고, 편백나무·때죽나무·서어나무 숲이 차례로 산책자를 맞아줬다. 망산교부터 산 정상까지 오르막이 가장 가팔랐는데 쉬엄쉬엄 걸으니 어렵지 않았다.

망산 정상에 올라서자 자잘한 한산도 부속 섬은 물론이고 멀리 사천과 남해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임진왜란 당시 저 아득한 바다를 뼈 빠지도록 노 저으며 다녔을 격군(格軍)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망산에서 숨을 고르고 종착지인 진두마을로 내려왔다. 면사무소가 소재한 섬 최대의 번화가라는데, 진두마을은 앙증맞을 만큼 작았다. 학교·우체국·은행 등 있어야 할 건 다 있었지만,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내를 추억하는 공간과, 지도에서 하나의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작은 마을을 잇는 길. 어쩐지 극적이었다.

●여행정보=통영항과 한산도를 잇는 여객선은 한 시간 단위로 다닌다. 어른 1만50원(왕복), 초등학생 5000원. 055-645-3329. 한산도 선착장에 탐방지원센터가 있다. 055-649-9207.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사무소(knps.or.kr) 055-640-2400.

글=손민호·최승표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언제나 푸근한 경남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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