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소득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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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심리적 중산층」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자신의 실소득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내 처지쯤 되면…』하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심리적인 환상일뿐, 중산층의 실상과는 다르다.
우선 3백만원 기준의 종합소득세 과세대상자가 5천명쯤 밖엔 추산되지 않는 현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많은 인구중에 0.014%에 지나지 않는 수치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과연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인 위안속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도 같다.
미국의 경우 이른바 중산층은 50%가 조금 넘는다. 소득분배를 계층별로 나누어 보면 마치 양파모양의 그림이 나온다. 그만큼 안정성이 높다. 대저 모든 나라들이 지향하고있는 「선진」에의 꿈은 그런 양파 모양의 도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산층은 당연히 사회의 중추적 존재이다. 그들은 하위의 소득자들에게 하나의 가능성 혹은 희망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된다. 또 그들 중산층이 안정을 누리고있는한, 세상은 평안하다. 중용적 정치도는 바로 그런데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반대로 중산층이 없는 사회는 불안하다. 양극화의 현상을 더해가기 때문이다. 부자는 날로 부자로, 빈자는 날로 빈자로, 그사이의 거리가 벌어져 가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마땅히 하위소득자에게 용기와 의욕을 주는 정책이 선행되어야 한다. 엄청난 거부도, 그렇다고 빈자도 아닌 소시민적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국가는 이들을 격려하는 쪽이어야 한다.
연3백만원의 소득은 월평균 25만원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봉급수준으로 보면 25만원은 「어퍼·미들」(中上)의 소득임엔 틀림없다. 한편 이것은 모든 소시민들이 지향하고 있는 목표수준쯤은 된다. 만일 우리사회에 이만한 소득규모의 인구가 많아진다면, 세상은 한결 일신된 면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백만원 종합소득자가 30%의 종합소득세를 물고 나면 월수는 17만5천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차라리 그 하위수준에 있고 싶어할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의욕의 후퇴를 의미한다.
국가는 과연 어느쪽을 선택할 것인가? 영계를 영계인채로 놓아둘 것인가, 아니면 그가 씨암탉으로 자라 알을 낳아 또다시 병아리를 품어내는 쪽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 병아리에서 영계로 자라는 과정에서 사료를 줄일 것인가. 종합소득세의 과세대상자가 극소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대중적인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심리적중산층이 실직적중산층이 될 수 있도록 국가는 더욱 좀 밀어주는 일에 배려가 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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