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제자는 정인승|<제29화>조선어학회 사건(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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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감방의 담배동지>
우리 세명 담배동지들의 담배도둑질은 귀신같았다.
홍원경찰은 예심조서를 꾸미기 시작하면서 다시 우리들을 바삐 끌어 내어다가는 볶아대었다.
그리하여 담배동지 세명은 하루에도 한 두 차례씩 끌려나가게 되었다.
담배동지 세명 중 1명이라도 끌려나갔다 올 때면 반드시 담배꽁초 하나라도 숨겨 가지고 들어와야 하는 것이 담배동지의 불문율이었다.
나는 이제 취조에도 익숙하여져서 대충 그들이 하라는 대로 적당히 대답을 했다.
버티어 보아야 뭇매 맞기가 일쑤이고, 어느덧 우리동지들 사이에 예심조서는 고문에 못 이겨 적당히 대답해주고 정식재판 때 부인하자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을 때는 취조 중 담배를 얻어 피울 수도 있었으며, 담배를 얻어 피우지 못했을 때도 취조가 끝나 나올 때 그들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를 요틈이나 발 사이, 또는 손가락 사이에 넣어 가지고 들어올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부끄럽고 아니꼬운 생각에 칼날 같은 자존심을 세워 참아도 보았지만, 무료한 감방생활이 오래 계속되는 동안 이것도 자연히 체념 속에 몸에 배게 되고 말았다.
담배꽁초를 형사들 몰래 집어 숨길 때는 오히려 부끄럼보다도 감방에서 내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담배동지 이은상과 서민호의 반겨하는 모습이 더욱 크게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만일 내가 부끄럼 때문에 이 꽁초를 집어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나는 이런 절박한 생각 때문에 더욱 안달이 나서 담배꽁초 숨기기를 게을리 할수가 없었다.
이은상이나 서민호도 아마 나와 똑같은 심경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 셋 중 한 사람이 가지고 들어온 담배꽁초는 소중히 불이 붙여져 우리 세 사람의 입으로 한 모금씩 빨려지며 돌아가게 된다.
몰래 숨어서 하는 것처럼 재미있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이때 한 모금씩 아껴가며 빨아대는 담배 맛처럼 맛있는 담배도 아마 없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셋은 간수의 눈에 띄지 않도록 삼각형으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상대방이 빨아대는 모습에서도 맛을 찾으려는 듯 빠끔히 바라보며 자기차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은 겨우 짤막한 담배꽁초. 재수좋은 날이라야 그래도 긴 꽁초가 걸려 겨우 서너 모금씩이 차례 갔고, 대저는 두 모금씩만 빨아대면 담뱃불에 손가락을 데기가 일쑤였다.
한방에 있는 김윤경과 이희승은 우리 셋이 하도 담배를 맛있게 빠는 것을 보고 우리 셋이 마주앉아 담배를 빨 때는 둘이서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하루는 이희승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담배가 그렇게 맛이 있나?』
『담배 맛을 모르는 사람은 참말 이 꽁초 맛의 기막힘을 모르지』
나는 이은상이 숨겨 가지고 온 꽁초를 받아 깊이 들여 마셨다가 되도록 천천히 아끼면서 연기를 살그머니 내뿜으며 대답했다.
『그럼 나도 한 모금만 빨아보게 해 주게.』
이희승이 바싹 다가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셋 담배동지는 일석의 이 말에 깜짝 놀라 정색을 하며 내뱉었다.
『아니 우리도 빨 담배가 없는데 맛도 모르는 사람에게 맛보여줄 담배가 어디 있나?』
이희승은 멀쑥해져서 단념한 듯 웃으며 돌아앉고 말았다.
결국 이희승은 일평생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으며, 나나 이은상은 그때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계속 애연가가 되었다.
심문 조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경찰은 사전편찬의 낱말풀이 이외에 조선어학회모임 자체를 항일운동을 하는 불법 독립단체로 몰아 치안 유지법 제1조에 해당하는 내란죄로 몰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전편찬 발기인만도 1백8명이나 되고 그 1백8명도 반 수 이상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있는데 대해 일제경찰은 조선어학회 모임 자체를 완전히 파헤쳐 소위 민족주의자들을 차제에 깡그리 없애려고 발버둥쳤다.
먼저 경찰은 조선어학회의 소식을 낱낱이 심문하여 발기동기, 그리고 활동 등을 열거하고 그동안 조선어학회가 해온 하나 하나의 활동과 한글보급운동, 그리고 회원 한사람 한사람의 거동을 캐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일본경찰은 드디어 상해임시정부와 조선어학회가 연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억지날조, 내란의 음모를 꾸밀 계획이었다고 덮어씌웠다. <계속> 【정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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