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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우방 참전부대(2)|「터키」군의 사투(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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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에서 전쟁이 시작된 지 사흘째인 50년6월29일 「터키」정부는 한국에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유엔」에 보내왔다.
그러니까 우방 중에서도 「터키」는 상당히 빨리 참전의사를 표명한 셈이었다.
그러나 5천90명의 1개 여단병력이 실제로 한국에 도착한 것은 그해 10월7일이었다. 그것은 7월25일에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새로 부대를 편성하여 약3개월간의 훈련을 끝내고 한국에 파견했기 때문이었다. 이 여단은 3개 보병대대와 1개 지원병부대로 구성된 제241보병연대를 주력으로 하고 이에 다른 1개 포병대대를 포함시켜 편성되었다.
「터키」군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대구에서 다시 약3주간 미국무기에 대한 교육을 받고 미 제25전 보병 사단에 배속되어 「유엔」군의 반격작전을 도와 북진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특히 「터키」군은 「유엔」군과 함께 청천강부근인 군우리에서 인해전술을 편 중공군과 처음으로 접전을 벌여 전 병력의 약20%나 손실을 보았으면서도 그 후에는 김포지구 한강반격작전, 서부전선방어전 등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적의 포위공격 악착같이 방어>
다음은 「터키」군이 한국전 참전 1개월 만인 50년11월26일부터 평북·안주동북방 군우리 덕천지역에서 벌인 전투이야기.
이 전투는 역전의 전통에 빛나는 「터키」군으로서는 가장 쓰라린 고투였다.
중공군이 개입하자 압록강 근변까지 밀고 올라갔던 「유엔」군 전선이 청천강으로 밀려나고 있을 무렵 「터키」여단은 미제9군단의 오른쪽 후미지역인 군우리에 포진하고 있었다. 「터키」여단은 11월24일로 예정되어 있는 「유엔」군의 이른바 「종전공세」를 군우리에서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종전공세」는 발기 2일 만에 중공대부대의 강습으로 좌절, 「유엔」군의 비극적인 총퇴각을 가져왔고 「터키」부대도 이 와중에 휩싸이게 되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은 「유엔」군의 방어선을 뚫고 군우리 동북쪽 덕천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이 방면의 중공군 진출을 늦추지 못한다면 아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에 「터키」여단은 「유엔」군이 완전히 후퇴할 때까지 미9군단의 우익을 사수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터키」여단은 덕천에 몰려온 중공군을 공격하기에 앞서 군우리 동북방 18㎞지점인 와원리 부근에서 산악도로를 차단하고 이날 밤을 이곳에서 새웠다. 이 산길은 군우리와 덕천을 연결하는 길목이어서 적은 이곳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여단은 다음날인 27일 새벽 덕천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여단이 덕천으로 전진하고 있을 무렵 미9군단장으로부터 전화명령을 받았다.
덕천으로 진격을 중단하고 26일 밤을 지낸 와원으로 되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여단이 행진하고 있는 전방 10㎞지점에 1개 연대규모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여단이 명령받은 지역으로 철수하고 있을 때 여단후미의 정찰대가 적으로부터 기습을 받았다. 이 기습은 「터키」여단이 한국전에 참가한 이래 겪은 첫번째의 큰 접전이었다.
적은 철수하는 여단을 뒤에서 엄호하고 있던 소수의 정찰대에 박격포와 기관총을 집중 사격하면서 공격해왔다.
이 기습으로 정찰대는 공병소대장 미통신대위를 비롯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여단이 안전히 이동할 수 있을 때까지 적의 공격을 잘 막았다. 적의 진격을 지연시킨 이 전투에서 「터키」정찰대는 몇 명 안된는 병사들이 살아 돌아왔을 뿐이었다.
적은 정찰대를 기습한데 이어 야음을 이용하여 대병력을 이끌고 여단의 뒤를 쫓아 와원의 산허리 전방초소를 지키고 있던 여단 10중대를 공격해왔다.
우세한 적은 10중대를 좌우로 둘러싸고 공격해 왔으므로 10중대만으로는 적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어 11중대와 9중대가 지원방어에 참가, 적의 포위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백병전 감행하며 적과 대결전>
적과의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동안 9군단본부에서 「터키」연락장교에게 구두로 전해진 명령은 군단의 우익인 미2사단이 후퇴하기 때문에 여단은 이를 엄호하여 넓은 지역을 방어해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터키」여단은 적의 공격을 받고있는 상태에서 미2사단의 퇴로를 지켜주어야만 했다.
북쪽과 동쪽에서 양면작전을 펴고있는 적의 병력은 상당히 우세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여단장은 적의 공격을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음을 판단하여 서쪽 7㎞지점인 신림리로 철수, 그곳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결정했다.
28일 밤 여단은 와원에서 신림리로 이동했다. 와원에서의 전투는 적의 진격을 24시간 이상 지연시켜 결국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미2사단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적의 증원부대는 여단의 뒤를 계속 뒤쫓았다.
여단본부와 지원부대가 신림리에서 약3km후방 봉명리에 미2사단과 합류했을 무렵 여단의 철수를 엄호했던 제1, 제2대대는 적으로부터 사방을 완전히 둘러싸여 퇴로가 끊기고 말았다.
좌우에서 협공해온 적은 신림리 북동쪽의 도로를 차단, 봉명리로 행하는 길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를 점령한 다음 1, 2대대를 공격해왔다.
여단과의 연결이 끊긴 1대대와 2대대는 이날 밤부터 다음날 정오까지 퇴로를 뚫기 위해 적과 접전을 피할 수가 없었다. 「터키」군 2개 대대는 포위 공격하는 적에 대항하여 백병전을 감행하면서까지 29일 낮까지 진지를 지켰다.
이때에는 이미 탄환을 모두 소비한 후여서 백병전으로 적에게서 뺏은 무기와 탄환을 사용하면서 적의 공격을 받고있는 형편이어서 더 이상 전부를 계속할 수 없는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전멸해야만 하는 위급한 순간 여단본부의 지원병과 미군「탱크」소대가 구출하러왔다.

<지형 잘 몰라 실수 범한 경우도>
「터키」군여단장은 여단의 후미를 지키던 2개 대대가 적으로부터 포위 당했음을 알자 군우리에서 옮겨온 제2교육중대를 신림리 지원공격에 내보내는 한편 미군의 「탱크」부대와 여단포대대 및 박격포중대로 하여금 적에게 집중 포격토록 하는 긴급조치를 취했다.
이 결과 봉명리로 향하는 도로를 장악하고 있던 적은 길을 비켜주지 않을 수 없었다. 포위 당했던 2개 대대는 이 지원공격을 받아 여단본부와 합류할 수 있었으나 희생자는 많았다.
이 때 「터키」군은 한국전에 참가한지 1개월 밖에 안되어 병사들이 전선에 아직 익숙치 않은데다가 중공군이 처음으로 인해전술을 감행했기 때문에 어리둥절했던 것 같다.
「터키」군은 심지어 군우리에서 적과 아군을 미처 구별하지 못해 철수하는 한국군을 적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미국의 전사가 「T·R·페렌버그」저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 에는 「터키」군의 당시 전투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때 제 미9군단은 한국군의 붕괴와도 관련이 있는 미제2사단의 엄호를 새로 도착한 「터키」군여단에 맡겨 그 부대를 군우리를 거쳐 덕천으로 가도록 했다.
이 「터키」부대는 사소한 것까지 모두 미제2사단과 긴밀한 협조를 하도록 되어있었다.
더구나 「터키」병들은 한국에서의 첫 교전이라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신이 없었고 탄약을 어디다 두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의 전방이 포위 당할 위기에 놓이자 제2사단장은 「터키」군을 대피시켰다. 계급장도 없는 미군장교가 그들을 방문하고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을 뿐이었다.

<명령 내리면 절대로 후퇴 안해>
모든 것이 오리무중으로 알 수 없는 일이 생기고 있었다. 5천 여명의 강병을 가진 「터키」여단은 동쪽으로 행군하다가 와원 근처의 촌락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들이 적을 쳐부수고 많은 포로도 잡았다는 전화보고가 있었다.
그 때까지 와원에 있던 중공군의 주력이 「터키」군을 별안간 들이쳤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는 모르나 요는 「터키」여단이 붕괴된 것이었다.
그러나 키가 크고 거무튀튀한 얼굴에 묵직한 외투를 걸치고 기다란 총검을 번쩍이는 「터키」군들은 좀처럼 물러나려 들지 않았다.
관측병들은 이렇게 말했다. 『장교들이 모자를 땅에 놓고 표시를 해놓으면 병사들은 이 표시 밖으로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적군에게 포위 당해 죽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적에게 총검을 들이대며 돌격해 들어간 「터키」병사들도 있었다.
11월28일 마침내 「터키」여단이 남서쪽으로 후퇴하여 제38연대와 연결되었을 때 「터키」여단의 불과 몇몇 중대만이 온당한 전투를 할수가 있었다.
「터키」군들은 미국인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거의 알지를 못했다. 「터키」군은 비록 나쁘게 이용됐을망정 전투는 치러야만 했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한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주요일지(1952년8월9∼12일)
※9일▲공산군 24시간에 2만6백발 발사 ▲이대통령 재선소신피력
※10일▲1천1백명의 민간억류자 석방 ▲「클라크」장군, 이대통령에게 재선축하전보
※11일▲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83명 부상
※12일▲판문점동방서 격전
◆알림=12월 중순 예정인 「민족의 증언」의 단행본출판관계 문의나 연락은 을유문화사로. 전화는 (73)8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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