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제29화>조선어학회 사건(4)|정인승<제자 정인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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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밤낮없는 고문>
정태진은 나와 연희문과 동창생이다. 미국에 유학을 하고 돌아와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조선어 사전편찬 일을 하자고 내가 제의하여 교편생활을 그만 두고 나와 더불어 화동 조선 어학회사무실에서 사전편찬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결국 홍원으로 증인소환장 한 장을 받고 제 발로 찾아간 그가 모든 것을 자백했다니 무엇을 어떻게 자백했단 말인가.
결국 한달 가까이 경찰에서 취조를 받으며 고문을 당했으리라 생각되니 그의 대꼬창이처럼 꼿꼿한 성격에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지 그의 얼굴모습이 아른아른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래도 호구지책이란 거짓말을 할 테냐?』
취조형사의 억양은 갈수록 험악해져만 갔다.
자백하라는 취조형사의 요지는 조선어사전을 편찬한다는 핑계로 민족사상을 고취시켜 독립운동을 획책, 기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씨름과 네모진 고무막대기의 고문이 1주일 계속되었다.
나는 아침·낮·저녁 하루 세 번을 끌려나갔다.
일제 형사들은 「메리야스」속 내의와 「팬츠」만을 입히고 계속 매질을 하고는 달래고, 또 달래다 가는 매질을 했다.
1주일을 이렇게 매를 맞고 들어온 날 저녁, 한방에 있던 감방친구가 입맛을 『쩍, 쩍』다시며 말을 걸었다.
『이런데 처음이요? 매를 맞지 않으려면 대충 저네들이 했다고 하는 대로 그대로 했다고 말하시오.』
그 감방친구는 『어디 보자고』하면서 내 옷을 벗기고 등어리를 들여다보았다.
나의 온몸은 검은 멍으로 용틀임이 되어 있었다.
1주일동안 고문이 계속되는 동안 굶다시피 한데다가 북녘의 10월초 날씨는 몹시 추웠다.
여름양복을 입은 그대로 밤이면 덜덜 떨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1주일만에 저네들이 했다고 위협하는 대로 승복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1주일 동안 취조내용을 전부 쓰라고 하더니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 그들이 하라는 대로했다.
이제는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이 끌려나가는데도 휘청거렸다.
소위 자백서에 지장을 찍은 후 나는 부축을 받다시피 하여 내 감방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는 이극로가 불려나갔다. 경찰서 마당을 꼿꼿이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보니 나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극로는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몸이 건장한데다 몸집이 좋았다.
나이 49세로는 볼 수 없을 만큼 장군다운 풍모마저 풍기는 그였다.
이극로가 끌러 나가고 나서부터는 취조실에서 지르는 고함소리가 감방에까지 들렸다.
취조장과 감방과는 꽤 먼 거리였는데도 쩌렁 쩌렁 고함소리가 온 건물에 메아리 치는 듯 들렸다.
그 고함은 날이 감에 따라 비명으로 변했다.
건장한 몸이니 고문도 심히 마구 다루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함소리가 울리다, 또 비명이 들리고 그 비명소리는 마치 감방 안에 있는 내가 고문을 직접 당하고 있는 듯 나의 피부에 아픔을 전해 주었다.
비명이 들리면 온몸에 짜릿한 통증이 왔다.
아직도 시퍼런 멍의 용들임이 온몸을 감고있는 나의 육신에 이 짜릿 짜릿한 통증이 오면 내 살도 내 살 같지 않게 별개의 육신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 통증은 내 손으로 내 살을 꼬집어보아도 아프지가 않고 이극로의 비명소리는 나날이 더 깊은 통증을 나로 하여금 일으키게 했다.
나는 내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이 아닌가 겁마저 들었다. 그러나 정신은 또렷또렷한데도 타인의 고문으로 인한 비명소리는 귓속까지 아리게 하는 것이었다.
걸걸한 이극로의 목소리가 내어 지르는 호령과 쩌렁쩌렁한 비명은 10일간 계속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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