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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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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학시절에 이미 정치가가 되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그림과 글도 내가 계속할 분야는 아니었다. 그림과 글에 열중했던 경험은 내가 이 방면으로 성공하기 위한 탁월한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해야했고 그때는-물론 지금도 그렇지만-사회과학이 적당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사회과학을 선택했는데 문제는 그 중에서도 어느 것이냐였다.
4학년이 되어서는 「프로이트」식 심리학을 중요시하는 강좌인 문학의 심리학적 측면을 수강했다.
그리고 두 가지 중요한 선택과목, 즉 「월리엄·몬타그」 교수가 강의하는 철학과 「프란츠·보아」 교수가 강의하는 인류학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나는 인류학을 택했다.
「보아」 교수는 놀라운 선생이었다. 한 쪽 얼굴에는 독일에서 학생시절에 얻은 긴 흉터자국이 있었고 한쪽 눈꺼풀은 축 처져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본 그의 얼굴은 젊은 시절과 마찬가지로 「핸섬」했다.
그의 강의는 겸손하면서도 명쾌했다. 때로 그는 어느 학생도 감히 대답해 내지 못하는 질문을 던지곤 했는데 이 때부터 나는 대답을 종이에 써넣는 버릇이 붙기 시작했고 답이 맞았을 경우에는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학기말에는 나와 다른 한 소녀가 『「클라스」에서 토론에 열심히 참가했다』는 이유로 시험을 면제받기도 했다.
후에 『문화영형』이라는 인류학저서로 유명해진 「루드·베니딕크」여사가 「보아」 교수의 조교였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머뭇거리며 말을 했는데 그의 얘기가 「보아」 교수의 딱딱한 강의를 한결 부드럽게 해줬다. 그는 「잉카」 제국이 얼마나 독재국가였나를 얘기하고 「인디언」들이 사로잡혔던 미신을 풍자했다. 이렇게 한 학기가 지난 후 나는 「보아」 교수의 강의는 모두 듣기로 결정했다.
봄이 되어 나는 인류학공부를 계속할까를 열심히 생각했지만 그 때는 이미 대학원에 응시하는 논문을 심리학으로 낸 후였다. 그런 어느 날 「베니딕트」와 점심식사 중 얘기 끝에 인류학으로 정할 것을 결심했다.
「베니딕트」와 나를 보다 친밀히 맺어준 것은 친구인 「마리·블룸필드」의 죽음이 계기였나. 「마리」는 저명한 언어학자 「레너드·블룸필드」의 동생으로 나와 비슷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의 외로움에 나는 끌려 들어갔다.
언젠가 그가 6주일간이나 병원에서 지낸 후 퇴원을 했는데 그를 데리러 갈 사람이 없어 내가 그 임무를 맡았었다. 텅 빈 기숙사가 얼마나 황량한지 알았기 때문에 나는 「마리」를 그의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일요일 밤까지는 물리학시험을 앞둔 다른 친구와 보냈다. 그러나 월요일이 되어서 저녁식사 때까지 「마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문을 부수고 그의 방에 들어갔다. 그는 약을 먹었던 것이다.
나는 「마리」와 함께 일요일을 보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자살에 대해 그 이후로 나는 신경과민이 되었다. 「마리」의 죽음은 모든 신문에 보도가 되었고 대학당국은 내게 「마리」가 건전하지 않았었다고 말하도록 강요했다. 나는 이 일에 완강히 반대를 했고 의사나 학장들의 성인세계를 다시 봤다.
이 중 단 한 사람 「베니딕트」만이 예외였다. 그는 자살이 건전하고 지각이 있는 선택일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줄 알았다. 그로부터 그를 선생으로서만이 아니라 친구로 여기게되었고 1948년 그가 죽을 때까지 이 우정이 계속되었다. 우리는 항상 서로의 편에서 있었고 서로의 저서를 읽고 「보아」 교수와 인류학, 그리고 세계에 관한 희망과 걱정을 나눴다.
이렇게 해서 「버나드」에서의 생활이 끝나갔다. 가을에는 결혼하기로 돼있었고 석사학위는 심리학으로 받고 또 인류학 공부를 이듬해 가을 다시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졸업무도회에서 「루터」와 나는 밤새 춤을 추고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산책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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