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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제자 이지택>|<제28화> 북간도(20)|이지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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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혼춘지방 황병길>
이때부터 북간도는 왜경의 검거선풍, 무력항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간다.
이보다 앞서 2월 18일에 국자가 하장리의 박동원 집에서 광복단이란 것이 조직되었다.
이 박씨는 연길도윤 공서 외교과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다.
이 광복단은 결사각오로써 독립운동에 임한다는 것이었는데 박동원 이홍준 이성근 박경철김영학 김순문 구춘선 이성호 백유정 최봉열 등이 참가했었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이 여러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단체들이 주동이 되어 용정의 만세에 이어 각지방에서 만세를 불렀고 독립만세를 독립이 이미 성취된 것으로 간주하여「독립축하회」라고 했다.
혼춘 지방에서 활약한 사람으로 황병길이 있었다.
황은 독립축하회를 계기로 박치환이란 사람과 함께 군자금 25만「루블」을 마련하여 각종무기 3백 정을 사들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
연길현 두도구 지방에선 16일에 1천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각 지방에서 잇달았다.
사태가 크게 번지자 일본 관헌은 연길도윤에게 압력을 넣어 마침내 3월 16일에 박동원이 면직되었다.
그러나 이때쯤 각가지 항일비밀결사가 사방에서 탄생, 만행을 일삼는 일본 관헌과 맞붙게 되었다.
명동학교 학생들로 된 충렬대는 김극서 라는 학생이 책임자였는데 단원은 약 2백 명이었고 명동학생 외에 정동의 정동중학생도 끼였다.
충렬대는 길림성에 있는 중국인 항일단체인 백룡단과 연결하여 기관총 l정을 사들였다. 3월 13일에 희생된 김병용은 이 단체의 단원이었다.
국자 가에는 자위 단이란 것이 있었다. 이는 국자 가에 있는 중국인학교의 한국인 학생들로 조직된 것인데 단장은 최모 라고 했다. 이 단체는 장총 40자루를 마련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또 애국청년 혈성단 이란 것이 있었다. 이것은 흑룡강성에 떨어져 있었으나 단원들이 간도까지 와 있었다.
이 무렵에 국민회는 8개 지방에 5천 명의 경호원을 갖고 있었고 홍범도의 무장군 90여 명도 있었다. 서일의 군정서도 있었다.
총재가 서일 이었고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최동원은 면직되자 도독부를 꾸몄고 김규면의 신민회, 김성극·홍두식의 광복단이 있었다. 천주교 교민들로 된 의민단, 북로사령부 등 독립군 단체가 난립했다. (이들의 무력항쟁기록은 독립운동사 등에 기록이 있어 다루지 않는다)
이들 중 민간 속에 묻혀 격렬하게 독립운동을 벌인 황병길을 잊을 수 없다.
혼춘에선 3월 20일에 만세를 불렀다. 황병길이 만세를 주도하기까지는 그때 수성군 참사인 임도준이란 사람이 두만강을 건너 연락해 주었고 황과 안태국·양하구 등이 협력한 것이지만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다.
이날 혼춘에는 약 6백 명이 모였고 황병길과 노종환, 그리고 광동 중학교의 교사·학생이 주동이 되었다.
황은 특히 거사를 전후하여 정보원을 교묘히 활용, 언제나 일본 관헌의 움직임을 미리 알아내서 그 뒤를 치는 것으로 일본 관헌들을 골탕먹인 재치 있는 투사였다.
연설도 잘 하고 명문가였다. 그는 이날 대회에서『우리 대 한국은 10년 전에 일본에 병탄된 이래 태황제 폐하로부터 동포 만민이 참담·처참한 꼴을 당했다. 그러나 아직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아 이번 강화조약으로 말미암아 독립의 기회가 다가왔다.
이때 우리민족은 일치단결하여 가는 길에 산이 있으면 넘고 강이 있으면 건너고 강적이 있다면 맨주먹으로라도 싸워 이겨 10여년 압제의 원한을 갚아야한다. 대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연설해 박수를 받았다.
그는 만세를 부르고 떠나면서 이별인사로『이제 혼춘 시가에 사는 동포들은 오늘부터 일본 관헌의 압박이 극심해 짐을 자각하시오. 이 점을 생각하면 실로 동정을 금할 수 없으나 깊이 생각하여 인내하고 일이 벌어지면 동지들과 더불어 동고동락하시오』했다.
이 말에 동포들은 눈물을 흘리고 숙연한 결의를 가졌다.
황병길은 1920년 6월4일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병사했다.
이 무렵에 앞서 함흥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힌 강봉우가 간도 일본총영사관에 송치되어 왔다.
이때 강봉우는 같은 무렵에 잡힌 한족독립기성회 통신부원 이홍준과 같이 조사를 받는 가운데서『독립운동은「파리」강화회의와는 상관없이 다만 조선민족의 독립의 열망을 세계에 알리려는 것뿐』이라고 주장, 왜경의 만행을 신랄히 공박했다.
조사를 마친 강·이는 4월 20일께 청진으로 송치되었다. 이 무렵 북간도의 재판관할법원 청진지원이 있었다.
이때 항일단체인 국자 가의 자위단과 명동의 충렬대에서 호송 중의 두 동지를 탈취하기 위해 용정∼회령의 길목에 잠복했다. 학생들은 담총을 하고 있었다. 명동학생들은 대납 자·남양평·호 천가 등의 험난 지대에 잠복했으나 이를 안 왜경이 대부대로 호송하는 바람에 끝내 무력탈취는 이루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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