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청룽과 맞겨루는 '얼굴 없는 악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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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배우' 박현진(30)씨의 별명은 '몽차차'다. '꿈에 젖어 사는 미치광이'란 뜻의 홍콩 속어라고 한다.

"기분 나쁘지 않냐고요? 천만에요. 누가 지어준 이름인데요." 그 별명은 바로 홍콩의 액션스타 청룽(成龍)이 붙여준 것이다. 1999년 청룽이 이끄는 유명한 스턴트팀 '성가반(成家班)'에 들어갈 때였다. 박씨는 오디션에서 3시간 동안 연기를 하면서도 일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감탄한 청룽이 이런 별명을 지어준 것이다.

박씨는 청소년 시절을 전북 부안에서 보냈다. 태권도 사범이던 아버지 밑에서 일찌감치 무술을 익혀 유단자가 됐다. 청룽의 연기에 매료됐던 박씨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흉내내는 것으로는 모자라 전주를 오가며 중국무술 책과 비디오를 사모았다. 멋있게 들리는 대사를 따라하기 위해 독학으로 중국어를 공부했다. 고교 졸업 직후 해병대에 자원해 복무를 마친 뒤 방송가와 영화판을 떠돌며 단역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생활을 했다.

태권도 4단, 합기도 4단에 킥복싱과 우슈의 고수인 그의 액션 연기는 빛이 났다. 소문은 입을 타고 돌아 젊은 무술 스턴트맨을 찾던 청룽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그는 생의 전환기를 맞게 됐다.

"오디션이 있은 지 보름 정도 지나서 초청장이 왔어요. 일등석 비행기표와 함께요."

그는 이후 청룽과 함께 '러시아워2''80일간의 세계일주''뉴 폴리스 스토리' 등 1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무수히 주고 받았고, 휘두르는 창과 칼 앞에 섰으며,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고, 자전거로 빌딩 벽을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손가락과 발목이 부러지고 얼굴이 찢어지는 상처도 입었다. 그러면서 영화 속 그의 비중은 갈수록 커졌다. 청룽이 주 활동 무대를 미국 할리우드로 옮기며 그의 주가는 더욱 치솟았다. 상대적으로 큰 키(1m75㎝) 덕분이기도 하다. 청룽은 특별한 액션 연기가 아쉬울 땐 한국말로 그를 찾는다고 한다. "일루 와바. 이거 할 수 있어? 이러케 탁탁탁탁-. 할 수 있지?"

그는 요즘 청룽과의 1대1 대결 장면을 독점하고 있다. 기껏해야 10여 분 출연에, 그나마 대역이지만 한편의 영화를 찍는 5~6개월 동안 청룽은 항상 그를 옆에 붙잡아 둔다. 액션 영화 전문가 김춘호씨는 "1980년대 황정리(영화 '취권' 출연) 이후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하는 한국인 스턴트맨"이라고 말했다.

홍콩 영화를 찍을 때는 수입이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지만 할리우드로 진출한 이후부터는 한 달에 1만 달러 정도를 받는다. 덕분에 아파트도 사고, 스포츠카도 샀다.

"꿈을 이뤘다 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죠. 이제 제 얼굴과 이름으로 일어서야 하니까요."

영화 자막에서만은 '박현진'이란 본명을 고집한다는 그는 최근 청룽과 김희선이 함께 출연한 영화 '경천전기'의 촬영을 마치고 휴식차 일시 귀국했다. 이달 중 '러시아워3'을 찍기 위해 다시 할리우드로 떠난다.

글=왕희수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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