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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출소 서자 청선 길림 변무공서 설치 잦은 충돌 일의 이정표 모두 뽑아내일, 걸핏하면 한인 핑계····파출소는 영사관 승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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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파출소 소장「사이또」밑에 총무과· 조사과· 경무과· 감찰과가 있고 따로 헌병분대가 있었다.
총무과에는 사무관 사무취급자가 4명,속 사무취급이3명,통역관사무취급1명,통역장 사무취급 4명이 있었다.
조사과에는 사무관 취급, 농· 상무기사 (두장) 가 었고 밑에 5명 외 직원이 있었는데 모두 일본인이었다.
경무과의 과장은 일본 육군 헌병 소좌 였고 밑에 순경 9명이 있었다..이 9명은 대개 한국인이었나. 그 중 1명의 이름은 이경재 였다.
감찰과는 과장이 한국인이었다.한국외교 서기관으로 김성철 최상잔이란 자였고 그 밑에 서기관 김해룡과 김덕재 김재린·강은영·박헌권·최재철·전복룡 등이다.
현병 분대장은 경무과 과장인「사까이」 (경야죽지진)가 경무였고 13명의 분견대장등 간부 이외에 40명의 군졸 (헌병)이 있었다.
일본이 간도 침략의 기지로서 이 파출소를 두었을 무렵 한국의 군비와 경찰은 한심한 것이었다.
빈국의 경찰은 잠무경이라 했다.정무경 이란 자가 책임자 였다.
이 청국경찰은 조직이나 장비면서 극히 미약해서 계행처(본부) 80명, 삼군15명, 이량25명.동도용가 2백25명,국자가 2백50명,두도구 2백명,광제곡1백20명,조양천15명,동불사1백명등 총 8백 여명이었다.
이밖에 이 넓은 지역,더욱 말썽이 많은 지역임을 감안해 시 십자군이란 군대가 사방에 있었다.
이 십자군은 호전용이란 자가통솔하며 스스르 「통령」칭호를 누리고 있었는데 원래 길강군 이란 사병이던 것을 귀순 시켜 관병으로 들린 것으로 규율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일본측은 이 십자군이 원래는 마적이던 것을 순화시킨 오합지졸 이라고 멸시했다.
한민족에게 행패를 많이 부린 중국인 중에는 바로 십자군이 더러 끼여있었다.
결국 우리 동포들은 이들과 일본헌병의 틈에서 고초를 겪는 것이었다.
특히 두 세력은 서로 한국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맞붙기 일쑤였다.
통감부 파출소가 생겼을 때 황국관혜은 크게 분격, 여러 번 철수를 요구했었다.
『나가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자 청국은 국자가에 길림 변무공서를 두어 육군중장에 해당하는 부도통 진소상을 변무독관으로 임명했다.
그 아래의 협도통에는 오녹정이 변무방관으로 왔다.육군소강계급 이었다.
오는 십자군이나 경찰이 위약한 것을 보고 따로 오녹정 휘하의 병력을 크게 증강한 뒤 파술소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때 청의 병력은 4천명 정도였다. 병력을 늘린 중국은 ⓛ간도문제는 어찌 되었든 두만강 이북지역은 본국 영토로서 시설 운영한다.②한국인에 대한 재판권도 전적으로 중국의 권한이다. ⑧한국 지방에서 차츰 뻗어오는 일본상인의 침투를 막는다는 등 5 가지의 시책을 밀어나갔다.
이같이 중·일의 두 나라가 팽팽히 맞서자 곳곳에서 싸움·무력충돌이 일어났다.
파출소가 개설 된 직후에 일본헌병은 한국사람을 시켜 회령에서 용정촌까지의 길에 이정표를 세운 일이 있었다.
중요한 길에 말뚝을 박은 것이다.1909년에 중국의 장교란 사람이 부하15명 가량을 데리고 와 이정표5개를 빼버리거나 도끼로 잘라버렸다.
즉 유명한 이정표 발목 사건이다.일본측은 변무독관 진에게 이를 항의 했는데 이 항의를 받은 준은 3월8일에 수많은 군대를 2대로 나누어 이정표를 전부 뽑아버린 것이었다.
용정촌에서 신오평 사이의 말뚝을 뽑은 것은 왕정서라는 준국 소좌 였고.회령에서 신전평 까지는 이영성이란 장교였다.
이들은 뽑은 말뚝을 마차에 싣고 국자가로 가다가 중간에서 일본헌병과 마주쳤다.왕정서와 이영성이 통감부 파출소로 끌려갔는데 왕정서의 몸에서 오녹정의 공문이 나왔었다.
이 공문의 내용은 『일본은 육도 구에서 도문 강변의 연도에 말뚝을 박고 우리 고유의 지명을 멋대로 고치고 있다.. 한 예를 보면 우리 무상두 품를 문화두 비전동으로 개명하고 무덕두를 영화두로 고쳤다.(본당판 오녹정을 가리킴)은 이를 허용할 수 없다. 말뚝을 박고 지명을 바꾸는 것은 위국의 주권을 해함이 큰 것이다. 이 당판은 이 땅을 지킬 책임이 있는 바로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일본측은 그렇다면 어찌하여 말뚝을 박은 지 6개월이 지나서야 뽑으며 더욱 밤을 타 뽑았는가 하고 이지명 등은 일본에서 지은 것이 아니고 한국 정착민들이 부르는 호침을 썼을 뿐 이라고 우리 동포를 걸고 넘어졌다.
이 사건은 오래 끌었다.
중국은 이 지방은 청국 영토이니 우리 고유명사를 써야 간다고 내세우고 말뚝에 한글이 었고 일본어 였다.
제 3자가 보면 어느 나라 땅인가 짐작이 가게 했으니 뽑는 것은 부당하다. 당신 (일본)들이 마음대로 세웠으니 우리 (청국) 가 마음대로 뽑는다. 장차 세우면 또 뽑을 것이다 라고 강경히 맞선 것이다.
1년 이상을 두고 중국은 교섭 끝에 한국인들이 사는 지방은 고유의 이름을 불러주도록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채 또 다른 사건이 나고 파출소는 영사관으로 승격,규모와 세력이 커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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