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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피 어린 산과 언덕>(6)|「피의 능선」전투(1)|고지쟁탈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1951년 8월 중순부터 11월 하순까지 양구동 북방『펀치볼』지역의『피의 능선』을 비롯한 가칠 봉·1211고지·1052고지 등에서 한국군 제5·제3사단과 북한공산군 제5·제6·제27사단간에 벌어진 혈전은 이 무렵의 한국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아군은 이 지역의 고지들과 능선을 확보치 못하면 양구와 인제를 중심으로 한 단일구역의 『횡격실 방어선』이 무너져 60「마일」이상을 후퇴해서『종격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군은「펀치 볼」일대의 능선에서 이미 두솔산·김일성 고지 등을 우리해병대에 뺏김으로써 사기가 크게 저하돼 있었지만 나머지 고지들은 사력을 다해 방어할 결심이었다.

<화력 전에 척탄병의 돌격전>
『피의 능선』은 양구 북방의 산맥을 따라 원산으로 이어지는 관문이기도하며 전략적 가치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피 아가 모두 필사적으로 확보하려고 했다.
한국군 제5사단36연대는 하루에도 아군과 공산군이 쏴대는 포탄이 8만여 발씩 되는 포 연속에서 10여일 간의 백병전을 전개, 이 능선상의 주 봉들인 983·940·773 고지 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한마디로 피의 능선전투는 화력 전에 소총병과 척탄병들의 사투가 곁들인 육탄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피의 능선』이란 이름은 당시의 미군 성조지 공군기자들이 붙인 것인데 2차 대전 때 미제2사단이 독일전선에서 싸우던 격전고지 이름인『피의 능선』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본떠서 명명한 것이다.
다음은 이 전투를 지휘했던 한 연대장의 이야기.
▲황엽씨(당시 제5사단36연대장=대령·예비역 육군소장·현 대한전매협회장·52)<피의 능선은 당시의 전황에서 볼 때 전술적 요새지로서는 철의 삼각지대나 백마고지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겠습니다.
우리 36연대는 8월17일부터 미제10군단이 포가 총동원 된 집중지원포격을 받으면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하여간 아군은 10일간의 전투에서 39만발의 포탄을 쏘아댔고 적도 이이상의 포격을 가해왔었지요. 이것은 이때까지의 한국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최대의 포격 전 이었습니다.
미8군사령관「밴플리트」장군도 이같이 말했고 2차대전의 참전경험이 있는 우리 포병연락장교「매거로노」중령은 일본 유황도 작전 때도 하루에 평균 3만발 정도의 포를 쏴댔을 뿐이라면서 이 전투야말로 그보다 훨씬 더 치열한 포격전이라고 하더군요.
포 신이 시뻘겋게 달아 찬물을 부어가면서 쏴댔고 심지어 기관총은 총열이 넓어져 예 광 탄을 못 쏠 정도였으니까요.
동북으로 원산까지 이어지는 산맥의 초입인 이 피의 능선에는 미군들은 T·U·V라고 부르는 3개의 고지가 있었는데 좌우에서 북한공산군 제5군단과 제2군단이 완강히 버티고 있었어요.
공격은 3개 대대가 1개 고지씩을 맡아했는데 조시형 중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가 가운데의 940고지를 제일 먼저 점령함으로써 좌우의 983·773고지는 비교적 용이하게 뺐었습니다.
940과 773은 점령 후 잠잠했지만 983고지는 지형적인 여건 때문에 몇 년이나 격전을 되풀이 했었어요.
이 전투 중 목 상자 속에 넣어 매설해 논 적의 대인지주 때문에 우리 소총 병들이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포탄으로 때려 지뢰밭을 경작해버려 놓고 올라가긴 했지만 지뢰사고로 상당수의 부상자가 났었어요.
포격은 공중폭발용·지상폭발용·지하폭발용 등 3종을 계속해 때립디다.
이같이 포탄세례를 퍼붓는데도 암벽을 뚫어서 만든 적의 견고한「벙커」는 한번에 2백80여 발의 포탄을 쏘고「네이팜」탄을 마구 퍼부어도 그대로 있었으니까요.

<포탄자국 벌집 쑤셔놓은 듯>
이런「벙커」들 때문에 서로 수류탄을 투척해 공격·방어하는 백병전이 전개됐고 이로 인한 인명피해는 아주 극심했던 겁니다.
▲조시형씨(당시 제5사단36연대 제2대대장=중령·예비역 육군소장·전 농림장관·45)<51년 8월 하순 양구 동북방『피의 능선』일대의 983·940·773등 3개 고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고지쟁탈전은 피 아의 동원병력이나 화력으로 볼 때 그 무렵의 한국전선에서 제일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처음엔 미 보병 제2사단이 맡아 싸웠으나 막대한 피해를 보고 전투능력이 약화돼버려 우리 5사단이 교대해 들어갔어요. 올라가 보니까 격전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울창했던 숲은 포화에 모두 쓰러져버렸고 능선의 비탈은 포탄에 맞아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데요.
나는 이때「말라리아」에 걸려 밤에는 헛소리를 하고 식사도 못해「주스」만 마시며 이 전투를 해냈어요.
우리 2대대는 처음엔 조공부대였다가 후반에 주공을 맡아 주로 야간전투를 했는데 그 동안의 포격으로 산이 싹 벗겨져 버려서 은폐할 장소가 없어 아주 곤란했어요.
우리 대대는 사단전차중대를 특별히 배속 받아 1주일동안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전투의「클라이맥스」는 적이 최후까지 버리고 있는『피의 능선』중 제일 고봉인 983고지를 공격할 때였어요.
바위를 뚫고「콘크리트」로 싸 바른 적「벙커」는 우리 8「인치」포에 정통으로 얻어맞아도 끄떡도 안 해요.
우리 돌격대가 고지50m까지 기어올라갔지만 은폐할 곳도 없는데다가「벙커」안에서 까 던지는 적의 수류탄 때문에 도저히 돌격을 못하겠더군요.

<부상적병 수류탄 들고 반항>
나는 생각 끝에 대대 안의 명사수들을 차출해서「벙커」안의 적병들을 쏴대도록 했습니다.
머리만 내밀고 수류탄을 던지던 적병들이 마침내 우리 명사수들의 총탄에 하나둘씩 넘어지데요. 그후에야 6중대가 고지정상을 돌격해 올라갔어요.
후방에서는 미군장성들이 나와 쌍안경으로 우리들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고지전투는 인접 미군사단들로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거지요.
고지를 점령하고 보니 호 속에 부상을 당한 적병이 한 명 있습니다.
손들고 나오라고 투항 권유를 했더니 주저앉은 채 수류탄을 까 던지면서 끝까지 반항하더군요.
죽어 넘어진 적병들의 개인 호 속에는 다 쏘지 못한 실탄이 한 가마 정도씩 들어있습니다.
『피의 능선』전투에는 적도 무수히 죽었지만 우리측 피해도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대대는 나와 작전주임을 제외한 장교들 모두가 전사나 부상을 당했으니까요.
7중대장은 전투 중 두 번이나 교체됐고 인사·보급참모까지 모두 부상을 당했습니다.
우리 2대대는 미군36개 포대대의 집중지원을 얻으며 싸웠는데 미군 포 관측 장교만도 30여명이 우리대대에 나와 있었어요.
한번은 고지에 올라와 있던 미군관측장교가 공격시간이 임박했는데 졸고 있다가 우리대대고문관「콜문」소령한테 걸려 되게 얻어맞았어요.
그 관측 장교는 후에 군법회의까지 회부돼 내가 그 경위에 대한 증언진술서를 써줬었는데 아마 중벌은 면했을 거예요.
밤이 되니까 적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올라옵디다. 마침 비가 퍼부어 고지는 진흙구덩이가 돼버리고 널려 있는 공산군시체들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정말 진저리가 납디다.
적이 밤새 공격을 해오는 바람에 다른 곳들은 모두 포기하고 대대병력을 983고지로 집결시켜 필사적으로 방어해냈어요. 나는 군대생활을 통해 이 고지를 점령했을 때처럼 기쁠 때가 없었습니다.>

<머슴출신 한 용사의 감투>
▲김순철씨(당시 제5사단27연대 부연대장=중령·전 농협전북지부장·현 사업·49) <우리27연대는 측면공격을 맡아 미군항공지원과 8「인치」포 지원을 받으며 능선의 무명고지들을 점령해 나갔습니다.
대대규모의 공격 전을 7번 벌였는데 4백여 명의 전사상자가 났어요.
한 무명고지에서 적의 역습을 받고 후퇴를 하는데 시골서 머슴살이를 하다 입대한 사병하나가 끝까지 남아서 달라붙는 적병 5, 6명을 개머리판으로 쳐죽이고 내려온 일이 있어요.
맨 마지막으로 내려온 그 사병은 온몸이 피투성이고 총구에는 적병살점이 붙어있더군요.
그 사병에게 즉각 훈장을 상신 해 주고 특별휴가를 보냈지요.
전장의 용맹은 때로 무식과 순 진에 비례하기도 하지만 하여간 그 사병의 무 훈은 당시 우리장병들에게 많은 감명을 줬고 지휘관들이 훈시 때마다 예로 들었습니다. 나는 사병들이 산비탈을 공격해 올라갈 때마다 지켜봤는데 그 가운데서 누군가가 전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우리5사단은 『피의 능선, 전투 후 1052·가칠 봉·1211고지 등에서 격전을 계속하다가 약화된 전력을 정비하기 위해 양양 대포리로 나와 FTC(야전훈련소)로 들어갔습니다.>

<주요일지> (1952년 5월27∼30일)
※27일 ▲정부, 국회의원의 공산당관련사건 공포 ▲일본경찰,「메이·데이」소요관련혐의 한국인 21명 체포
※28일 ▲휴전회담교착계속 ▲「유엔」한 위, 이 대통령에게 체포의원석방 권고 ▲국회, 96대3으로 계엄령해제 건의
※29일 ▲영천포로수용소 폭동 ▲김성수 부통령, 국회에 사표제출 ▲「무초」대사,「워싱턴」에서「트루먼」에 한국 정 정보고
※30일 ▲국회, 공산당관련으로 체포의원을 82대0으로 석방 건의 ▲「웨인·모스」상원의원, 한국 정정 조사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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