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의 표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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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동빈씨<홍콩 우련 연구소장>
서동빈 씨는 27년 북경에서 출생, 곤 명에 있는 동서 남 연합 대학을 졸업하고 종전 후 북경대학에서 서양문학을 전공했다.
55년 공산권문제 연구기관인 우련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임명되고 67년 동 소장에 취임했다. 서씨는「홍콩」에 본부를 둔 이 연구소에서 중공문제를 연구해왔다.
본사는 창간 7주년을 맞아 중공문제 전문가인「홍콩」의 우련 연구소장 서동빈 씨를 초빙, 남-북 적십자회담으로 긴장이 완화되고 있는 한반도정세와 3극화시대의 중공에 관해 본사기자와 1문1답을 나누었다.
문=지금까지 세계는 주로 홍콩을 통해 흘러나오는 정보자료를 가지고 중공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늠해 왔다. 그런데 이곳으로 흘러나오는 자료의 질은 어느 정도이며 그 질은 최근 중공의 대외정책이 과거보다 개방적인 것으로 변하면서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가?
답=「홍콩」을 통해 나오는 자료는 주로 ⓛ간행물 ②피난민·방문객에서 얻은 간접자료 ③북경 및 각성에서 방송되는 보도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들은 언제나 충분한 자료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지금까지 중공문제 분석이나 진단이 정확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중공지도자들이 도저히 예측 못할 방향전환을 자주 했는데도 이유가 있다. 그나마 내가 속해있는 우련 연구소는 54년에 이미 중-소 분규가 앞으로 있을 것을 예측했으며 모택동과 유 소기의 권력투쟁도 예측했다. 그러나 문화혁명이라든가 모택동과 임 표와의 갈등과 같은 문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사실 중공의 경우 단기적 예측은 퍽 어렵지만 내부문제의 세심한 검토를 토대로 10년 내지 20년의 장기적 예측은 현재 우리가 입수할 수 있는 정도의 자료로도 가능하다고 본다.
양적 면에서 볼 때 중공이 공식으로 내어놓는 자료는 현재 줄어드는 형편이다. 예를 들어 문 혁의 초기단계인 66년 중공이 발간한 간행물은 신문을 포함해서 6백 종 정도였다.
그것이 문 혁 전성기인 67년에는 1백32 종으로 줄어들었고 다시 68년에는 58종으로 줄어들었다. 금년에 들어와서 고고학과 같은 비정치적 분야의 저서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 1백 종을 넘지 못하고 있다. 또 한가지 문혁으로 중공·홍콩간의 밀수 루트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요즘 와서「홍콩」이 접할 수 있는 정보자료는 오히려 양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문=문 혁 이후 중공의 대 공산권, 그 중에도 특히 대북한정책에는 어떤 변화가 왔다고 보는가?
답=중공은 문 혁 이후 현실주의, 온건주의의 방향으로 그들의 일반 정책노선을 바꾸었다. 중공은 문 혁 중 북한에 대해「조선수정주의자」라고까지 비난했으며 북한 쪽에서도 이에 대해 거의 적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태도를 보였었다.
그러나 홍위병의 난동이 차차 수그러지고 문 혁이 수습기에 들어서자 차츰 북한을 무마하는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고, 요즘 와서는 북한이 소련보다는 중공에 더 가깝다는 점이 확실해지고있다. 요즘의 관계를 볼 때 67년 홍위병이 북한반대「데모」를 벌일 때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중공은 북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원조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권아래 두려는 보다 폭넓은 외교의 일환이 아닌가 생각된다.
문=북한측이 남-북한 적십자회담에 응하도록 하는데 중공은 어떤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는가? 또 앞으로 진행될 남 북한교섭에 있어서 중공이 북한에 대해 작용할 수 있는 영향력의 폭은 어느 정도라고 보는가?
답=나로서는 이 문제에 관해 추측이상을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남-북 적십자회담이 지향하는 한반도 긴장완화는 중공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이 사업을 지원할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로 그들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도 미지수이다. 아마 자기들의 정책을 강권하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영향을 미치려 들것이다. 아시아의 군소 국가를 자신의 위성국가로 만들고자하는 중공의 장기적 목표에 따라 중공은 처음 북한을 자신의 영향권속에 넣고, 다음에 남한을 끌어들이려 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 단계에서 통한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문=중공이 현재 추진하고있는 방대한 범세계적 외교공세를 뒷받침할 만큼 중공내부상황은 문 혁 후유증을 마무리했다고 보는가?
답=현재 외면상으로는 중공이 퍽 안정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중공은 현재 모 시대와 모이후시대의 중간지점에 와있다. 사실 모의 지배력은 과거에도 퍽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과거 어느 때고 모가 스탈린과 같은 절대권력을 쥐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55년 집단농장 (합작사) 문제로 유 소기와의 분규, 59년 대약진결과에 대해 팽덕회가 던진 도전, 62년 유 소기에 의한 공개적 도전, 문 혁 등은 모두 모의 지배력이 절대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문 혁 기간 중 모의 지지파가 외치던 극 좌파적 정책이 쇠퇴하고 주은래의 보다 현실적인 정책이 실시되는 것으로 보아 모의 사망 후에는「스탈린」격하운동과 비슷한 모 격하운동이 전개될 건 뻔한 일이다.
이밖에도 국내불안의 요소는 많다. 한때 15명이던 부수상이 지금은 3명뿐이다. 당 중앙서기국은 문 혁 이후 다시 조직되지 못했고 정치 국에는 3분의1만이 남아 있다. 군부는 임 표의 숙청에 따라 중공군 총 참모장 황영승, 공군사령관 오법헌, 해군사령관 이작붕 등이 숙청된 그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다.
다만 외교분야에서는 문 혁 중에도 비교적 피해를 안 보았기 때문에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활발한 움직임이 그래도 가능한 것이다.』
문=중공의 유엔가입과 서방국가와의 외교관계 수립으로 중공은 지금까지 지켜온 민족해방전쟁지원 정책을 어느 정도 수정할 것으로 보는가?
답=중공이 유엔안보리 의석을 차지한 후 첫「비토」를, 「방글라데시」가 입안을 부결시키는데 사용한 사실로 그와 같은 속단이 나올 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예외로 봐야할 것 같다. 그들은 계속 민족해방전쟁을 지원하겠지만 대국으로서의 실리의 입장과 제3세계의 지지를 얻기 위한 원칙적인 입장사이에서 상당한 딜레마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문=전중 수상의 방중이 실현되어 곧 일본과 중공사이에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는데 현 시점에서 앞으로 일-중공간의 갈등의 씨를 찾는다면 어떤 것이 있는가?
답=『첫째 중공은 일본의 내정에 영향력을 미치려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있을 것이며, 둘째 국제적으로 동남아지역에서 일-중공간에 무역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이 두가지이유로 초기의 밀월이 끝나면 틀림없이 일-중공 사이에는 불화가 올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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