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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를 낚아챈 사진,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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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 1974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이 일본인 사진가는 관광객 차림으로 극장에 들어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카메라의 조리개를 열어뒀다. 결과는 백색 공백. 동시에 영화에 주목하느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어둠 속 공간, 극장의 내부구조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작가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65)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찰나의 미학을 쫓아온 사진이라는 매체를, 시간의 흐름을 담는 데 활용했다.

 #2.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전시장엔 영국왕 헨리 8세와 그 여섯 부인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다. 15∼16세기 인물들이니 초상 사진일 리는 없다. 런던 마담 투소 박물관의 밀랍인형들을 찍었다. 고색 창연한 이 19세기 인형들은 헨리 8세의 궁정 화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에 기초해 만들었다.

스기모토 히로시는 회화와 이를 기반으로 제작된 밀랍인형, 그리고 현대사진으로 연결되는 미술의 역사를 한 장의 사진에 꿰었다. 사진 속엔 재현의 문제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도 담겼다. 작가의 말은 이렇다. “이 사진들이 실물처럼 보인다면, 여기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 볼 만하다.”

 현대사진의 거장 스기모토 히로시의 국내 미술관 첫 개인전 ‘사유하는 사진’이 5일부터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다. 초기작 ‘극장’(1975∼) 시리즈를 비롯해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일 바다 앞에서 고대인의 비전을 사유한 ‘바다(1980∼)’ 시리즈, 19세기 탈보트의 번개 실험에 기원을 둔 근작 ‘번개 치는 들판’(2006∼) 연작 등 49점이 나왔다.

 난해한 전시공간으로 꼽히는 이 미술관 ‘블랙박스’(렘 콜하스 설계)엔 영상 ‘가속하는 불상’, 조각 설치 ‘5원소’ 등을 선보인다. 흑백사진으로만 알려진 이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스기모토는 194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릿교대학(立敎大學)에서 정치학·사회학을 공부했다. 미국의 아트센터 디자인 칼리지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2001년 ‘사진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핫셀블라드상을 수상했고, 2009년 영국 더 타임스의 ‘1900년 이후 활동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 200명’에 꼽히기도 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1995), 베를린 구겐하임 미술관(2000), 도쿄 모리미술관(2005)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3일 만난 그는 “내게 사진은 타임머신과도 같다”고 말했다. “사진을 통해 인간 역사의 여러 순간을 오갈 수 있다. ‘헨리 8세’의 경우 홀바인의 16세기 초상화를 토대로 해, 이 시기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해졌다. ‘바다’는 고대로 되돌아가는 경험을, ‘번개 치는 들판’은 19세기 과학이 실천되는 현장으로 우리를 이끈다”고 설명했다.

 - 사진가라기보다 개념미술가에 가깝다.

 “그렇다. 내가 하는 예술작업의 도구로 사진을 활용하는 셈이다. 나는 카메라를 목에 걸고 돌아다니면서 찍을 대상을 찾는 사진가는 아니다. 개념적 시각 아이디어를 떠올린 뒤 그걸 구현할 방법에 집중한다.”

 - 풍경·과학·초상화 등 관심사가 다양한데.

 “나는 머릿속에 수백 가지 아이디어를 갖고 그걸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보여줄지, 20년이고, 30년이고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린다.”

 그는 자칭 ‘시대착오주의자’다. 19세기 대형 카메라와 전통적 인화 방식의 명맥을 유지하는 장인적 기술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8000분의 1초 이상의 속도로 순간을 잡아채고, 이를 손쉽게 편집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역행하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전시장의 흑백사진들은 예술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숭고미를 일깨우며, 지금이 아닌 과거 혹은 오래된 미래로 우리의 생각을 이끈다.

“예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기억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처음, 사람이 되었던 때를 기억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전시는 내년 3월 23일까지. 성인 7000원, 초·중·고생 4000원. 02-2014-6900.

권근영 기자

스기모토 히로시 사진전
내일부터 삼성미술관 리움
헨리 8세와 부인들 밀랍인형
사진으로 재현 … 생과 사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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