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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산·강·길·도시|본사 이광표 특파원 평양 왕래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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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산천은 여구했고 비목도 다를 것이 없었다. 「27년의 세월」에 가렸던 산하가 눈앞에 다가온다. 8월29일 10시40분.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자 펼쳐지는 풍경. 우거진 잡초, 「아카시아」나무들은 얼마 전 설레는 가슴으로 지나온 우리측 비무장 지대와 다를 것이 없다.
얼마 안가 낯선 북한측 경비 초소를 지난다. 길 양편에 늘어선 「플라타너스」 가로수, 그리고 벼이삭이 패기 시작한 논들이 속력을 내기 시작한 자동차 대열 옆을 스쳐갔다. 「어서 나누자 혈육의 정을」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통일 이룩하자」는 구호가 눈에 들어온다.

<가로수엔 흰「페인트」칠>
「포플러」·「플라타너스」, 그리고 이따금 버들로 이어지는 가로수의 밑동은 약 50㎝가량 흰「페인트」칠이 되어있다. 낮선 풍경이다.
길가로 펼쳐진 밭들. 「스프링쿨러」가 물을 뿜고있다. 어떤 종류인지 알 길이 없는 얼마 자라지 않은 채소밭이다.
멀리 야산엔 「아카시아」나무가, 때로는 잔솔밭이 이어져간다.
그리고 그 야산 기슭에 마을이 보였다. 모두가 기와집들이다. 기와의 둘레에 흰 칠을 한 것이 보이고 벽은 흰색.
마을에서 연기가 짙게 찌푸린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시간은 11시도 안된 늦은 아침. 아마도 점심을 짓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길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부터 이어진 「콘크리트」 포장도로, 2차선 폭이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갑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소년들의 행렬. 「빨간 넥타이」를 목에 두른 소년들의 질서정연한 행군이다. 소리내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계속 치닫는 차창에 길 옆 우거진 「플라타너스」 가로수 옆으로 집들이 보인다.
개성에 접어드는 듯했다. 「개성입니까?」 「네」 안내원의 대답이다. 10시45분.
시속 90㎞의 차는 거의 단숨에 시가를 빠져나갔다.

<마을은 「일자 집」의 행렬>
무엇을 봤을까? 엶은 「베이지」색의 「아파트」건물이 널찍한 차로 옆에 서 있는가 했더니, 남대문 송악산 쪽으로 뻗은 폭넓은 도로를 보는가 싶더니, 벌써 차는 시가 중심지를 벗어난 듯 신축 중인 「아파트」가 시야를 가렸다.
그러자 펼쳐지는 산과 들. 산엔 우거진 숲은 없었다.
얼마안가 내가 길옆에 보인다. 길은 「커브」가 많다. 다리를 건너고 김일성 초상화가 내 걸린 건물이 지나고 마을이 산모퉁이에 보인다.
지명을 알 길이 없었다. 안내원도 모르는지 물어도 설명이 시원치 않다.
이상하게 생긴 「트랙터」들이 도로 옆에 보인다. 뒤에 「트레일러」를 달고 짐을 실은 것도 있다. 우리 일행의 자동차 대열이 지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인가? 움직이질 않는다.
산에 밤나무들이 보인다. 집단 재배 같지는 않다.
길은 어느 새 「아스팔트」 포장의 4차선로 폭으로 변해 있었다.
낯익던 가로수는 안 보인다. 대신 길가에 늘어선 「코스모스」 한두 송이의 꽃이 보인다.
마을이 다가서자 「농촌의 전화」는 이미 끝났고 「수도화」도 곧 전국적으로 끝난다는 안내원의 설명이 시작됐다.
마을의 모습은 일자 집의 행렬이다.
『천연 「슬레이트」 지붕입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지붕을 보니 알 수가 있었다.
옹기종기 농가가 모여 있는, 내 눈에 익혀진 농촌 풍경은 아니었다.
검은 지붕 흰 벽의 방 3간의 집이 열을 지어 서 있는 모습. 열은 한 줄이기도 두 줄이기도 또는 세 줄이기도 했다. 낮은 담장도 하얗게 칠해져 있다. 협동농장인 것이다.
색이 유난히도 희게 보인다. 찌푸린 날씨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마을에 인기척이 없다. 농촌엔 흔히 보이는 노란 개나 검정개도 안 보인다. 뛰노는 아이들도 물론 안 보인다.

<간선 변에만 보이는 집들>
비는 부슬 비더니 어느새 빗발이 커졌는지 모른다. 차창에 빗물이 줄을 이었다.
빗속에 차창가를 스쳐 가는 밭에선 「스프링쿨러」가 여전히 물을 뿜고있다.
산엔 나무가 많아 보였다. 그리고 과수원이 저 멀리 산중턱에 자리잡은, 풍경이 펼쳐져 간다. 금천을 지났다.
풍경이 단조롭다. 마을이 이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따금 마을이 나타날 땐 바로 길옆이거나 멀리 떨어진 산기슭이다.
경작지를 되도록 확보하려는 것일까? 농촌인구의 과소 때문일까?
안내원의 설명은 분명치가 않았다.
아낙네들이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차는 계속 고속으로 치달린다. 시속은 l00㎞를 넘고 진동이 심하다.
『평산을 지났다』는 설명이 잘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평양∼개성도 단선철로>
길은 어느덧 철로와 나란히 뻗어간다. 『개성∼평양간만은 전화가 안돼 있읍니다.』 철로를 살펴보는 우리를 보자 건네는 안내원의 설명.
『단선인 이 선로는 「디젤」기관차로 달리지요.』 설명은 계속된다.
서흥을 지나니 양쪽엔 옥수수의 연속이다. 꽤 오래 같은 풍경의 연속이다.
어느덧 12시가 넘었다. 사과밭이 산중턱에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안내원에 물으니 『봉산이 얼마 안 남았다』는 대답.
산과 밭, 마을뿐이던 시계에 공장건물이 들어왔다.
크고 높은 굴뚝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시멘트」 공장이다. 안내원의 설명도 그렇다는 것.
저 멀리 산기슭엔 흰색의 건물이 또 보인다.
『닭 공장입니다. 우리는 닭을 치는 것을 공업화했디요.』 규모가 큰 양계장이란 뜻이었다.
『안보이지만 돼지 공장도, 함경도엔 오리 공장도 있다』고 설명은 계속됐다.
봉산. 차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질 않는다. 차창에 스치는 길가의 건물에 「청계상점」 「편의」의 간판이 보였다.
「편의」란 복잡한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니 「서비스」점이란 뜻인 모양이다.
다시 밭과 산. 고개를 넘어서자 길 옆 철로에 열차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과수원도 「북청교시」로
여객 차다. 「디젤」기관차에 끌린 검푸른 색의 객차의 창은 「커튼」을 내렸고 열차 승무원인 듯한 제복의 승무원이 승강구에서 우리의 자동차 행렬을 바라보며 스쳐갔다. 「버스」도 몇 대 보았다. 길가에 비켜서서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는 것도 있었고, 저 멀리 좁은 길을 달리는 것도 보였다. 차형은 우리의 구형「버스」와 비슷하다. 30명 정도의 정원이 아닐까?
「트랙터」도 자주 보인다. 빨갛게 익은 사과를 실은 「트레일러」를 매단 「트랙터」.
봉산을 지나서 펼쳐진 포도밭은 꽤 넓었다.
바라보는 우리를 의식했는지 안내원은 『우리의 과수원은 김일성 수령의 북청교시에서 비롯했다』고 설명에 열을 올린다.
북청에서 사과 재배를 지시했고 그후 각지에선 그 고장에 알맞은 과수 재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리원에 들어섰다. 전혀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는 설명.
나중에 이 고장을 아는 동료 기자에게 들었지만 「그렇다」했다. 황해도를 남북으로 가르고 도의 중심지가 되어서 그런지 모르나 넓은 길, 늘어선 건물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거리 한가운데엔 10m폭의 운하가 있었다. 수양버들이 시원스럽게 가지를 늘어뜨린 운하의 한쪽은 「아파트」, 넘어서면 공공건물이 서 있다.

<산에 무덤 찾아 볼 수 없고>
물은 서흥에서부터 끌어온다던가? 사리원을 지나면서 길은 넓어진다.
논바닥에 전봇대 같은 것이 있고 「스피커」가 매달려 있었다. 그 주변에 모여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황주 부근에서 연도에 사과밭이 보이기 시작했다.
빨갛게 사과가 익었고 사과를 따는 것도 보인다. 여기서도 산에 나무는 많지 않았다. 붉은 흑점이 군데군데 보였다.
이상한 것은 판문점서 이곳까지 산에 무덤이 많이 보이지 않는 일-. 안내원은 『북한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화장을 못하게 되어있다』고 말했지만-.
중화를 지나면 평양으로의 길은 좋다. 「아스팔트」 4차선의 길이 거의 직선으로 뻗는 듯했다.
새 도로인지 가로수가 안 보인다.
이 길은 옛 평양에의 길은 아니다
철길을 건너 시내로 접어들어 선교리로 대동교로 이어 본 평양으로 들어가는 길은 예대로 이다.

<옛 화신백화점은 그대로>
그러나 선교리「로터리」에서 신리를 거쳐 사동으로 가던 길이 크게 뚫렸다. 새로 놓인 옥류교에서 뻗은 길이 「메인·스트리트」로 바뀌고.
본 평양도 옛 황금정에서 전찻길을 따라 경제리 쪽으로 뻗었던 길 양쪽은 새로 만들어져 옛 「삼중정」자리 우체국, 그리고 평양 최대의 음식점이던 「미까도」, 서선 일대 최대의 약국이던 법교국 약국, 큰 책방이던 동명서관, 가장 큰 요릿집이던 장춘관, 유명 중국요릿집이던 동승루, 백선행기념관 등은 이미 자취도 없다. 다만 옛 화신백화점은 그대로 남아 복구가 되어 제일백화점이 되었다는 것. 옛 부민관은 전쟁 때 일부가 파괴됐으나 수리하여 지금은 평양예술극장이 되어있다. 실향민이 그리고 있는 옛 평양은 없었다.
모란봉은 숲에 덮여 을밀대는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고 TV「타워」가 치솟아 있다. 만수대 관상대 자리에는 천리마 동상이 서 있고 동평양 쪽에서 4번째의 「빔」이 끊어져 내려앉았던 대동교는 복구되어 있었다.
해방 후 48년 산업박람회를 열었던 동평양쪽 대동교 입구 오른쪽 터 바로 옆에 적십자회담이 열렸던 대동강회관이 세워져 있었다.

<모란봉에 기자릉 없는 듯>
그 주변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길이 넓어져 그 전의 모습은 전혀 없다. 신리일리의 오른쪽 길가에 있던 감리교회의 검은 지붕, 뾰족했던 종각도 없고.
대동문은 도시계획으로 강가에서 조금 안으로 물러섰다는 얘기였고, 보통문은 도심에 나 앉아 있다.
동대원에 있던 비행장은 없어졌고 그 자리는 공원과 「로터리」.
흰색 상의 연색 바지의 교통 안전원이 서서 옥류교를 건너는 차의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평양거리의 가로수는 온통 수양버들. 간간이 벚나무, 「플라타너스」 등이 끼여있다. 도심지의 가로수도 밑동은 흰 둘레를 감았다.
모란봉에 있던 기자릉은 없어진 것 같았다. 안내원의 설명은 역사가들이 날조한 것이 드러났다고만 실명했지만.
보통강도 운하처럼 강 양쪽을 다스려 놓고 있었다. 평양역 광장은 별로 넓혀져 있지 않았다.
평양시가의 건물에 달린 전등은 모두 백열등이었다. 평양역전의 역전백화점 앞을 지날 때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으나 고객은 하나도 안보였다.

<전선은 모두 지하에 묻어>
우리가 다녀본 「코스」로 치면 도심인 중구역, 평양 대극장이 있는 외성구역 등은 이미 개발된 곳이고 대동강구역이나 서성구역은 지금 개발되고 있는 고장이었다.
짓고 있는 것은 모두 똑같은 「아파트」였다. 소년 궁전은 옛 장댓재 부근이다. 소년 궁전 7층에서 동·북쪽으로 건너다 보이는 언덕, 그러니까 상수리 같기도 하고 설암리인 듯한 곳에 낡은 기와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소년 궁전 뒤에는 향교 같은 건물이 있으나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동평양에서 건너다보면 옛 황금정에서 오른쪽으로 남산재·장댓재·만협대·모란봉을 잇는 언덕에 북한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이 중 가장 큰 것이 만수대의 혁명박물관인데 한 안내원은 『옥상에서 축구할 수 있디요』 했다.
전깃줄은 모두 지하로 묻혀 보이지 않고 「버스」같이 생긴 무궤도 전차와 간간이 「갱생」이란 이름의 「지프」모양의 차가 오가고 있다.

<관공서에도 간판은 없어>
건물에 간판은 거의 없었다. 관공서에도 간판은 없었고 오직 김일성의 초상화 「노동당 만세」 등의 구호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옥류관 근처에 평양양복점이란 간판을 보았고 「남새 불고기 집」 「인민약국」 등 몇 개의 간판을 보았다. 심지어 외인전용 상점인 대동강 상점에도 간판은 없고 「아파트」는 모두 번호로 불린다고 했다. 대동강 물만이 예와 다름없이 흘렀으나 비 때문인지 맑지는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두 시간 정도 쉬었던 개성도 옛 고도는 아니었다. 역 앞에서 남대문으로 뻗은 사거리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북쪽으로 삼성동-만월대로 가는 길, 동쪽으로 경덕궁 가는 길과 선죽교로 가는 길이 예대로 있었으나 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작은 「로터리」가 생기는 등 모습은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송악산 기슭에 있던 유명한 인삼목욕탕은 없어졌다는 얘기였다. 그 자리는 작은 공원이 되고 인삼탑이 세워지고 인삼뿌리 모양의 분수대가 생겼다는 설명이었지만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여자중학 된 옛 원정국교>
옛 큰 건물로는 원정에 있던 원정국민학교 건물만이 오직 하나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학교도 이제는 여자중학교로 바뀌었다고 선죽교 관리원이 말했다. 건물 정면에는 대형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선죽교 못미처 지점에 인민병원이 새로 지어져 있었는데 그 옥삼에는 한글로 「무상치료·무병장수」라고 쓴 표어가 걸려 있었다.
4층으로 된 자남산 여관은 남북적십자회담에 대비하여 석 달 전 새로 지은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내부는 비교적 산뜻하고 깨끗했고 건물은 흰색이었다.
선죽교는 전과 다름없었고 표충각도 예대로였다. 이 일대는 선죽교가 있는 수로를 중심으로 길 한가운데 화단을 가꾸는 등 공원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나무가 울창했다. <계속>
차례 1, 「유일 사상」의 물결 2, 산·강·길·도시 3, 북의 생활 4, 남북회담의 장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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