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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15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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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상해사변 전후>
내가 「하와이」를 떠난 것은 모국 형님들로부터의 학업재촉 때문이었다. 나에게 편지를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자 이 박사에게 직접 부탁한 것 갈다. 윤치호씨나 윤치소씨(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와는 교회의 선교사 편으로 연락이 잦았고 특히 윤치소씨와는 독립운동자금 관계가 깊었었다. 이 박사가 임정보다도 더 빠르고 자세하게 모국의 정세를 안 것도 그런 때문이다. 과연 나는 「프린스턴」에 가서 본격적으로 전공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박사와 약속이 있었다. 「하와이」서 발족한 동지회를 미주전역에 확장하는데 책임을 맡아야 했다. 따라서 나는 학업시문과 동지회 시간을 조절하여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특히 「뉴요크」의 동지회 조직이 관건이었다. 성패의 문제라고 할만큼 중요했다. 우리동포들 중에서도 교회관계나 경제·학계 등에 있어 많은 쟁쟁한 「멤버」가 「뉴요크」에 많이 와있었다.
이 박사는 「워싱턴」의 구미위원부를 한 달에 한번 꼴로 둘러본 뒤 「뉴요크」로와 2, 3일 머무르다 가곤했다. 동지회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거의 모든 동포가 호응했다.
당시 「뉴요크」에는 세계의 기본단체가 있었다. 자활단체로서의 교민단은 홍득수 단장이 이끌고 있었고 한인기독교회는 가장 견실했던 교포실업가 안정수씨가 헌금하여 교회를 세우고 재력을 기울여 윤병구 목사와 장세균 목사가 번갈아 운영하고 있었다. 유학생회에는 장덕수·최용진·김양수·허정·남궁련·윤홍섭·김도연·이철원 등이 활약했다. 장덕수와 김도연은 특히 나와 인연이 있어서 경제공황이 한창일 때 같은 「아파트」에서 고학을 한 친구이기도하다. 이봉수·이진일씨 등 실업가들은 이러한 한인사회를 측면에서 도왔다. 모두 이 박사와는 끊을 수 없는 동지사이였다.
내가 이박사의 광복운동 특히 그의 능란하고 눈부신 활동을 본 것은 「컬럼비아」대학에 있을 때다. 나는 국제법을 공부하기 위해 이박사의 친구이자 국제법의 세계적 권위이던 「하이드」박사를 찾아 「컬럼비아」대학으로 옮겼다. 마침 그 무렵 상해사변이 일어났다.
우리의 광주사건이나 만주의 유조구 사건에서도 그러했듯이 이 박사는 지체없이 날아왔다. 1932년이라고 기억된다.
이박사가 「뉴요크」에 오면 으례 숙소는 「브로드웨이」근처의 「호텔」 「매컬핀」이었다. 여기의 주인이나 지배인은 이 박사를 잘 알고 있었고 이 박사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협조자였다. 지금은 3류로 떨어졌으나 당시에는 「뉴요크」의 최상급 「호텔」이었다. 한가지 특기할 것은 이박사가 남이 보지 않는 일상생활은 최하로 하면서도 남의 눈에 띄는 생활만은 누가 보아도 손색없게 의젓해 보여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망국민의 초라한 꼴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그는 싫어했고 이것은 이 박사의 외교신조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신조에 따른 이박사의 지시로 격에 어울리지 않는 생활을 했다. 당시의 나로선 월25「달러」이면 아담하고 넉넉한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는데 50「달러」를 들여 호화판 「아파트」를 빌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한번도 게대로 고기도 못 먹고 일상 감자로 지냈다. 이 때문에 나의 아내와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매컬핀·호텔」은 이 박사의 오랜 단골이었다. 이 박사가 들면 단 하루를 묵고 가더라도 반드시 그의 방안과 창밖에 태극기를 달아 주었고 번화가에서 많은 행인이 눈 여겨 보곤했다. 국빈대접의 표시였으나 이 박사로서는 광복운동의 한 방법이었다.
한가지 나 자신의 여담이지만 나는 이 「매컬핀·호텔」 때문에 환국(일제시) 후에 일경으로부터 혼이 난 일이 있다.
이 박사와 나란히 태극기가 서 있는 「매컬핀·호텔」앞에서 찍은 사진이 일경의 가택수색에서 발각되어 결국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었다. 그런 일도 있고 해서 나는 일기 따위를 쓰는 습관이 없다. 상해사변이 나자 날아온 이 박사는 활동의 기회를 얻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와 같이 기상하면서 수행하고 다녔다. 그는 도착하자 바로 상·하원의원과 언론계를 찾아다니기도 했고 전화로 대화하기도 했다.
그는 의회지도자 30여명과 친숙한 사이였고 극동문제에 대한 그들의 자문대상이기도 했다. 상원의 「모리스」의원이나 「놀랜드」의원 등은 이박사의 전화를 받고 뛰어왔었다. 당시 일본과 「아시아」의 문제는 그들의 관심사였고 이박사의 견해가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이 박사는 일본의 한국침략이 대륙진출의 발판이며 유조구 사건과 상해사변은 그 단계라는 논지였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 없이는 일본의 영토확장주의를 막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이 박사의 「아시아」관은 20년에서 종전에 이르는 수십년 동안 미국여론의 뼈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헤럴드·트리뷴」지의 주필 「윌리엄즈」씨나 「뉴요크·타임스」의 「존스턴」이나 「촌멜」·「솔즈버그」씨 같은 필봉들은 이 박사와 견해를 같이했던 미국인들이다.
나는 이 박사를 수행해 다니면서 그가 어떠한 연유와 「테크니크」로써 그러한 언론계의 거물들과 가까워 질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신기하기만 했다.
「하워드」계의 신문과 「허스트」신계문에서도 이 박사에 대한 태도는 다른데 못지 않았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오후의 「티·파티」를 열어 이 박사를 초대했다.
이 박사도 공식으로 상해사변에 대한 그의 의사를 표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컬핀·호텔」의 연회장에 각 「매스컴」의 기자를 초대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최상급의 대형 만찬회였다. 신문인만해도 50, 60명이 넘었다. 이박사의 배짱도 배짱이려니와 「호텔」측의 성의도 놀라운 것이었다. 「호텔」의 명예스런 자랑이기라도 한듯 주인이 진두지휘하는 것이었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서있는 앞에서 이박사의 핵심을 뚫은 명연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 일인승려가 죽은걸 기회로 일으켰던 일본의 상해사학은 마침내 미국의 강경 정책에 부딪쳤다. <계속> 【윤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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