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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선교사·학생으로 만나 싸우면서 정든 24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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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81년 여름. 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발 대구행 비둘기호 열차에 종종 몸을 실었다. 밤 9~10시쯤 탄 기차는 찜통처럼 더웠다. 어렵사리 얻은 좌석에 엉덩이를 들이미는 백발의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면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아이고, 밤새 고생하겠네."

하지만 아련하고 즐거운 추억도 적지 않았다. 바구니에서 뛰쳐나간 닭을 잡기 위한 소동이 한바탕 벌어지면서 기차 안이 웃음바다로 변하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 대구역에 도착했을 때는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에 어느덧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지곤 했다.

당시 내가 먼 길을 마다 않고 만나러 간 친구들 중에 지금까지 편하게 지내는 친구가 바로 권태휘(權泰輝.42.뉴웨이스인터내셔날 상무)씨다. 81년 당시 태휘는 경북대 불문과 1학년이었다.

태휘를 만난 것은 선교활동을 위해 한국 땅을 처음 밟았던 79년 대구의 한 교회에서였다. 당시 그는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당시 나는 태휘가 얼마나 소중한 친구인지 몰랐다. 18개월간의 한국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친구의 의미를 깨달았다. 부산 자갈치시장과 대구의 공원.학교 등에서 그와 함께 했던 즐거운 추억이 눈에 어른거려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81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교환학생으로 지원, 태평양을 다시 건넜다. 태휘를 비롯한 내 한국 친구들은 가정환경이 넉넉하지 못했다. 대구로 내려갔을 때 함께 묵을 곳이 마땅치 않아 여관 신세를 져야 했고, 숙식비는 내 몫이었다. 난 친구들에게 농담을 건네곤했다.

"나도 돈 없는 학생이야. 너희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지금을 잊지 말아라."

우린 서로에게 좋은 말만 해주는 친구는 아니었다. 80년대 초.중반 정치적 견해 차이로 서로 얼굴을 붉히곤 했다. 보수적 가정환경에서 자란 나는 한국인들의 과격한 시위가 이해되지 않았다.

"태휘야, 한국사람들은 왜 미국을 미워하는 거지. 또 미국을 욕하면서 왜 미국회사에 들어가려고 하니."

태휘는 특히 대학 때 카투사(KATUSA.주한미군에 파견된 육군 사병)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미군들이 한국과 한국인을 업신여기는 것을 보고 반감이 깊어진 것 같았다. 한편 카투사 근무 중에 태휘의 영어실력도 빠르게 향상됐다. 특히 영어로 말하는 욕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했다.

"미국인인 나보다 영어 욕을 더 많이 아네."

"할리, 너도 나보다 한국 욕을 많이 알고 있지 않니."

"나한테 욕 가르쳐 준 게 누군데. 태휘, 너라고!"

이쯤 대화가 진행되면 우리는 서로 웃고 있는 상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난 97년 한국으로 귀화했다. 이름을 하일(河一)로 짓고, 영도 하씨의 시조가 됐다. 귀화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 한국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겪게 될 크고 작은 어려움도 신경이 쓰였다. 귀화 이후 세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감내해야 했다. 실제 " 네 나라 가서 살지, 왜 귀화했냐"는 말을 듣기도 했으니까.

며칠 전 집 앞에서 20세 남짓 된 대학생이 나에게 손을 흔들며 "하이(Hi)! 할리, 하와유(How are you)?"라고 말을 건네와 순간적으로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미국식 인사법으로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는 데도….

"이 녀석, 내 나이가 벌써 45세다. 어른한테 하는 말버릇이 왜 그래. 내가 니 친구니?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해야지." 청년을 꾸짖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한국인 하일이다.

난 친구란 서로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싸우면서도 서로 쉽게 화해하고, 더불어 도움이 필요할 때 힘이 되어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선 난 운이 좋다. 며칠 전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태휘를 만나기로 한 약속을 깜빡 잊고 광주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약속시간 보다 30분이나 늦은 시각에 태휘가 전화를 걸어와 "왜 이렇게 늦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사과했고, 그는 내 바쁜 생활을 아는지 넉넉한 웃음으로 내 상황을 이해해 줬다. 또 요즘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는지 식사 대접을 자주 한다.

난 방송에서 구수하고 능청스런 경상도 사투리로 많은 이들을 웃긴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원래 난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처럼 외향적으로 바뀐 것은 청년기 때 만났던 태휘 등 한국 친구들과의 소탈하고 격의 없는 만남 때문이었다.

남은 인생에서 태휘 같은 옛 친구들을 황금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지켜갈 생각이다.

정리=하재식 기자

<하일 약력>

▶1979년:미국 캘리포니아주 유바시티고교 졸업, 선교사로 18개월간 한국 파견 근무
▶81년:연세대 정외과 1년 유학
▶87년:웨스트버지니아주립대 로스쿨 졸업
▶87년~현재:한국서 변호사로 활동
▶95년:방송계 입문
▶가족관계:아내 명현숙씨와 3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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