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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식 개혁 … "난 상처받은 교회 택하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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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비가 내리던 지난달 9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일반 알현을 위해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 모인 가톨릭 신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바티칸 로이터=뉴스1]

“나는 자기 안위를 지키느라 속으로 병든 교회보다는 길거리에 나가있어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운 교회를 택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6일(현지시간) 첫 ‘교황 권고’를 발표했다. 교황이 직접 작성한 84쪽 분량의 권고에는 교황이 강조해 온 ‘빈자를 위한 가난한 교회’의 밑그림이 드러났다. 교황이 그동안 추진한 ‘위로부터의 개혁’의 핵심에는 교황과 교황청의 권력부터 약화시키겠다는 역발상이 자리 잡고 있다. 힘이 집중되는 곳에는 부패가 생길 수밖에 없는 만큼 바티칸의 권력을 각 교구에 나눠줘야 한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6일(현지시간)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 중 신경섬유종증을 앓고 있는 남성을 감싸 안고 축복하고 있다. [바티칸 인사이더 캡처]

 교황은 권고에서 “교황이 전 세계와 교회에 영향을 미칠 최종적이고 완전한 의견을 내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교황의 교권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어떤 제안도 열린 자세로 환영하겠다고 밝혔다.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이른 것은 오늘날에는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를 행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그런 경제가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라고도 일침을 가했다.

 그의 파격적 쇄신 조치는 이전부터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개혁 성향의 피에트로 파롤린 대주교를 국무원장으로 임명한 교황은 곧바로 검은돈의 오명을 떨치지 못했던 바티칸 은행과 사도재산관리처에 칼을 댔다. 바티칸 은행에 대한 외부 회계감사 결과를 최초로 공개하고, 외부 금융사를 고용해 교황청의 부동산과 주식 등을 관리해 온 사도재산관리처 조사에 착수했다. 이탈리아 마피아를 수사해 온 검사가 “교황의 개혁조치로 인해 마피아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이들이 교황을 노릴 수 있다”고 경고했을 정도다.

 가장 큰 파격은 교회의 금기사항을 다루는 교황의 열린 태도다. 동성애자들도 자비를 갖고 포용해야 한다거나 교회의 혼인 무효 절차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할 때마다 가톨릭 교리에 변화가 생기는 것 아니냐며 전 세계가 들썩였다.

 특히 교황은 내년 10월 ‘가정 사목과 복음화’를 주제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임시총회를 소집하고, 전 세계 주교회의에 신자들의 가정생활 실태를 알아보라는 사상 초유의 ‘지구촌 풀뿌리 설문조사’를 지시했다. 39개 설문조항 모두 ▶동성 간 결합 ▶이혼·재혼 ▶혼전동거 등 전임 교황들은 언급조차 꺼리던 예민한 문제들이다. 영국 BBC 방송은 “조사 내용을 보면 교황이 꾀하는 교회 개혁의 범위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알 수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개혁 조치만으로는 ‘프란치스코 효과’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교황이 사랑받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올해 인터넷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인명 1위가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이고, 4위가 그의 트위터 계정일 정도이니 말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무신론자조차도 교황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라는 기사를 통해 “교황이 추구하는 게 이념이나 특정 종교 교리가 아니라 평등주의와 인간 가치의 본질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큰 울림을 준 일화는 ‘엘리펀트 맨’과의 조우였다. 지난 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알현이 마무리될 무렵 교황은 한 남성 앞에서 멈춰 섰다. 영화 ‘엘리펀트 맨’을 연상시키는 남성은 머리 전체가 혹으로 뒤덮여 있었다. 교황은 5만 명의 신자 속에서 발견한 남성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축복하더니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바티칸 전문지에 보도된 이 사진 한 장은 전 세계에 퍼지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교황의 축복을 받은 이는 이탈리아 남성 비니치오 리바(53)였다. 그의 질병은 피부와 중추신경계의 이상을 유발하는 신경섬유종증이었다. 리바는 “내 병이 전염성은 아니었지만 교황은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 먼저 내 얼굴부터 감싸 안았다”며 “1분 남짓한 침묵의 시간 동안 나는 천국을 경험했다”고 CNN에 말했다.

 최근에는 한 여성이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유부남과의 사이에서 임신을 했는데 이후 버림받았고, 태어날 아이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은 교황은 직접 여성에게 전화했다. “만약 자매님 교구의 사제가 아이에게 세례를 주지 않는다면 나에게 데려오세요. 내가 직접 세례를 주겠습니다.”

 교황의 리더십에 열광하는 데는 좌우가 따로 없었다. 미국의 정치전문 주간지 내셔널 저널은 “미 공화당 지도부는 ‘가톨릭 교회도 우리처럼 (보수라는) ‘브랜드 문제’를 갖고 있었지만, 교황이 약자에 대한 연민과 포용력을 보여주며 해결했다’며 롤모델로 삼고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도 “이제 전 세계의 자유주의자들은 버락 오바마를 대신할 ‘핀업(벽에 핀으로 사진을 꽂아둘 만한 우상)’을 찾아냈다”고 보도했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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